A씨는 보증금 4000만원에 월세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B씨는 결혼하며 모은 돈 1억5000만원으로 전셋집을 구했다.
그러나 이 둘의 운명은 2016년을 기점으로 갈라졌다. 그 해 A씨는 경기도 분당의 34평 아파트를 전세(보증금 6억5000만원) 끼고 사들였다. 은행 대출을 받으니 현금은 1억원밖에 안 들었다. 이른바 ‘갭 투자’ 방식이었다. A씨는 이듬해 같은 방법으로 분당의 60평대 아파트를 추가 매수했다.
가계부채, 전세금 합쳐 3250조
GDP 대비 135% 단연 세계 1위
박근혜 정부 이후 대출 증가세
문재인 정부 대출 확대 집값 폭등
상환능력 따라 대출 제한하고
단기 부양책 접고 일자리 늘려야
B씨도 내 집 마련의 희망을 갖고 매달 200만원씩 적금을 부었다. 하지만 눈여겨봤던 아파트의 매매가가 치솟아 꿈은 멀어졌다. 오히려 B씨는 전세보증금이 계속 올라 전세자금 대출까지 받았다.
2025년 현재 아파트 가격을 적용해 계산하면 A씨의 순자산은 25억 2000만원, B씨는 4억7000만원으로 5배 이상 격차가 벌어졌다.
한 일간지 기사를 바탕으로 만든 이 사례는 SNS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20·30대 젊은층 사이에서 정부의 저리 대출과 전세보증금 등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영끌 투자’는 이제 대세로 자리 잡았다.
가계·기업 연체율 급등, 부채 경고등 한국의 국내총생산(GDP)대비 가계부채비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국제금융협회(IIF)의 올 1분기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가계부채비중은 90.3%로 조사 대상 38개국 중 캐나다(100.4%) 다음이다. 미국(68%), 일본(61.8%), 영국(76%)은 물론 ‘빚의 만리장성’이라 불리는 중국(61.1%)보다 높다.
한국에만 있는 신용제도인 전세보증금을 합치면 압도적인 세계 1위라는 주장도 있다.
김세직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2023년 국제결제은행(BIS) 집계 한국의 가계신용(2248조원)과 전세보증금(1002조원)을 합친 가계부채는 3250조원에 이른다고 분석했다. 이는 GDP의 135%로 세계에서 가장 높고, BIS 기준(80%)을 훨씬 초과하는 위험 수준이다.
특히 한국 민간신용의 절반은 부동산에 쏠려 있다. 보수정권, 진보정권을 오가며 ‘강남 집값’ 때려잡기에는 입장이 달랐지만 부동산 관련 대출은 2014년 이후 매년 꾸준히 늘었다. 박근혜 정부는 주택담보대출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을 완화했다. 한국은행은 기준금리를 2.5%에서 네 차례에 걸쳐 1.5%로 내렸다. 당시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박근혜 정부가 부채로 경기를 부양하려고 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역시 주택담보대출과 전세대출을 크게 늘렸다. 문재인 정부 출범 첫해인 2017년 126조원이던 주택담보대출은 2022년 191조8000억원으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전세대출도 18조 원에서 44조5000억원으로 2.5배 가까이 급증했다. 서민·중산층·자영업자의 내 집 마련을 돕는다는 명분 아래 정책금융을 더 풀었다. 그 결과 강남3구(강남·서초·송파)에서 시작된 집값 폭등은 마용성(마포·용산·성동)을 거쳐 노도강(노원·도봉·강북)까지 확산됐다.
이재명 정부 장기성장률 0%대 될 수도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한국은 빚을 내 무리한 투자를 하거나 과소비를 하면 그 끝이 얼마나 참혹한지를 이미 여러 차례 경험했다.
1997년 말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부동산값 폭락으로 대출을 끌어 아파트를 산 개인들은 큰 고통을 겪었다.
2002년 카드대란 때 신용불량자는 360만 명을 넘어섰다. 2011년 부동산 PF(프로젝트파이낸스)로 인한 저축은행 사태는 금융시장 전체를 흔들었다.
개인들이 원리금을 갚을 만큼 소득이 늘면 가계부채는 큰 문제가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 경제의 미래는 갈수록 암울해지고 있다.
한국은행의 전망에 따르면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2025~29년 1.8%에서 2045~49년엔 0.6%까지 추락할 것으로 예상된다.
김세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장기성장률이란 개념으로 한국경제를 분석했다. 경기부양책 등 단기 요인을 제거하고 전후 10년 치 경제성장률의 평균을 구한 것이다. 좋은 일자리가 얼마나 늘어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김 교수 분석에 따르면 정권마다 장기성장률이 1%포인트씩 떨어지고 있다. 김영삼 정부 6%, 김대중 정부 5%, 노무현 정부 4%, 이명박 정부 3%, 박근혜 정부 2%, 문재인 정부는 1%대로 떨어졌다. 윤석열 정부에서 성장률이 더 하락했으니 이재명 정부는 0%대 장기성장률에서 헤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소득 감소는 내수 위축, 주식·부동산값 하락, 부채 위기, 금융 불안을 거쳐 경제 전반의 붕괴로 이어질 위험이 높다. 이미 부채 위기의 ‘경고등’이 들어왔다. 2022년 1분기 0.56%였던 가계대출 연체율은 올 1분기 1.05%로, 기업대출 연체율은 0.7%에서 2.84%로 급등했다.
일본 전철 안 밟으려면 구조개혁 시급 지금 한국은 버블경제 붕괴 후 ‘잃어버린 30년’이란 장기 침체를 겪은 일본과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
버블 붕괴 전후 일본은 세 가지 구조적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부동산 관련 부채가 급증하고 ▶저출산·고령화로 장기 침체에 접어들었으며 ▶글로벌 제조업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일본 내에서 이러한 구조 변화가 가져올 위기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기업·은행·국민 등 거품 성장의 ‘단맛’에 취해있던 이해 당사자들의 반발로 구조 개혁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일시적인 경기 대응 정책에 의존했다. 그 결과 일본 정부의 현재 재정 여력은 파산 선언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바닥난 상태다.
일본은 또 저성장·저물가를 막기 위해 마이너스 금리로 돈을 풀고, 위험자산을 매입하는 통화정책을 펼쳤다. 이러한 정책은 반짝 효과는 있었으나 일본 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데는 실패했다.
한국의 GDP 대비 정부부채 비율은 50% 정도로 아직은 여유가 있는 편이다. 그러나 일본처럼 구조 개혁을 하지 않은 채 단기 대응에만 급급한다면 한국경제의 회복은 완전히 물 건너갈 것이다.
정부가 소득 감소와 부채로 신음하는 가계를 위해 재정을 투입하더라도 원칙을 지켜야 한다.
정부 예산은 자활 노력을 하는 사람들에게 우선적으로 투입해야 한다. 이재명 정부는 출범하자마자 7년 넘은 5000만원 이하 채무자 113만명의 빚 16조4000억원을 탕감해주겠다고 나섰다. 부채 탕감이 정확한 심사 없이 이뤄진다면 도덕적 해이를 부추기고, 성실히 빚을 갚아온 선량한 채무자의 자활의지만 꺾을 것이다.
또 장기적으로 성장에 도움이 되는 지속 가능한 분야를 지원해야 한다. 지역화폐를 나눠줘 일시적으로 소비를 진작하는 것은 경제 성장에 거의 도움이 안 된다. 연구개발 지원, 청년 일자리 창출, 여성 고용 확충 등 일자리를 만들어 경제의 선순환을 불러오는 분야에 과감히 예산을 집중해야 한다.
개인이 나중에 갚을 수 없는 규모의 대출을 끌어들여 비싼 주택을 사는 것은 투자가 아니라 투기다. 정부가 최근 주택담보대출 한도를 6억원 이하로 제한했지만 오히려 뒤늦은 감이 있다. 우리나라 평균 소득을 감안할 때 6억원도 원리금을 상환하기 쉽지 않은 액수다. 느슨한 금융 규제와 개인의 투기심리가 결합할 때 거품은 극대화되고, 거품이 꺼지면 국가 경제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다. 국가의 금융자산이 제조업 등 생산적 분야가 아닌 부동산에 쏠리는 것은 망국적 현상이다.
한국은 외환위기 직후처럼 ‘창조적 파괴’가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다. 외환위기 때 부실 기업·금융기관의 구조 개혁으로 위기를 극복했듯, 현 위기는 정부·기업·가계 등 경제주체 모두가 고통을 분담해 구조 조정에 나서야 한다. 구조 개혁이 늦어지면 한국 경제는 저성장과 부채의 늪에서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