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4월 25일 평양 인근의 남포조선소. 북한이 최신형 5000t급 구축함이라고 선전하는 최현함 진수식이 열렸다. 이 진수식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샴페인 브레이킹 행사에서 노광철 국방상이 도끼를 들고 밧줄을 잘랐다.
#2. 지난달 13일 함북 나진조선소에서도 최현함과 같은 종류의 구축함인 강건함의 진수식이 있었다. 청진조선소에서 진수식 도중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보는 앞에서 옆으로 넘어져 체면을 구긴 뒤 재차 열린 진수식이었다. 이날 샴페인 브레이킹의 밧줄 절단은 조춘룡 노동당 군수공업부장이 맡았다.
공식행사서 구찌백에 바지 차림
김정은의 곁은 딸 주애가 지켜
북, 최근 김정은 우상화에 집중
4대 승계 위한 상징조작일 수도
샴페인 브레이킹은 선박의 안전한 항해와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로 샴페인 병을 배에 부딪혀 깨뜨리는 행사다. 중세시대 바이킹족이 바다의 신인 포세이돈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쳤던 데서 유래했다. 뭍에서 건조한 배를 바다에 띄우는 진수식을 여성들의 출산에 비유해 샴페인 브레이킹 때 도끼로 밧줄을 끊는 모습이 탯줄을 자르는 의미라는 설도 있다. 그래서 진수식에는 선주의 부인이나 딸, 혹은 정부 고위 관계자의 부인 등 대모(大母)라 불리는 중장년 여성이 밧줄을 끊는 게 관례다. 북한도 2023년 9월 김군옥영웅함으로 명명한 잠수함 진수식 때 최선희 외무상에게 그 역할을 맡겼다. 이번에 진수한 함정은 북한이 최대 규모이자 최신형이라고 ‘자랑’한다는 점에서 진수식의 대모는 퍼스트레이디인 이설주나 김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이 할 만했다. 그러나 북한은 최현함·강건함 진수식 때 관례를 깨고 장군 계급장을 단 남성에게 대모 역할을 맡겨 궁금증을 남겼다.
1년6개월 만에 공개석상 등장한 이설주 이런 북한의 이상 동향에 무게를 더한 건 1년 6개월 만에 공식 석상에 등장한 이설주의 행동이다. 북한은 지난달 24일 강원 원산에 건설한 갈마해안관광지구 준공식을 진행했다. 김 위원장은 11년에 걸쳐 공사를 한 ‘야심작’의 준공식에 부인, 주애로 알려진 딸과 함께 등장했다. 북한 조선중앙TV는 준공식 장면을 담은 동영상을 33분 18초 분량으로 편집해 지난달 26일 6차례에 걸쳐 내보내며 리조트에 대한 기대감을 보였고, 주민들에게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런데 이 영상에서 이설주는 다소 의외의 행동을 이어갔다. 김 위원장을 태운 요트가 행사장에 도착한 순간 이설주는 남편에게 목례를 하는 등 이전보다 위상이 하락한 것으로 의심받을 모습을 보였다. 남편과 딸은 요트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지만 이설주는 혼자 요트 출입문으로 나와 최선희와 대화를 나누다 김정은이 등장하자 깜짝 놀란 듯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목례를 하는 모습이 여과 없이 방영됐다. 남편이 나타나자 부인이 마치 수행원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인사를 한 것이다. 이설주가 김 위원장과 결혼했다는 사실이 알려진 직후인 2012년 7월 김정은의 팔짱을 끼거나, 각종 행사 때 김 위원장과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파격으로 평가받던 당당했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이설주의 어색한 모습은 진수식과 기념공연 등에서도 이어졌다. 이설주는 남편과 딸 뒤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걷거나, 김 위원장과 일체의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또 지난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선물한 아우르스 승용차에 탑승하는 장면에선 김 위원장이 딸을 뒷좌석 문까지 데려다 주며 챙겼지만 이설주는 안중에 없는 분위기였다. 김 위원장 부부 사이에는 마치 부부싸움을 한 직후처럼 냉랭함마저 느껴졌다.
무엇보다 이설주가 이날 착용한 복장도 미스터리다. 이설주는 명품인 구찌 로고가 선명한 핸드백을 들었지만, 검은색 바지에 흰색 반팔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딸에게 흰색 투피스 정장을 입힌 것과 대조적이었다. 이설주가 바지를 입고 공식 매체에 등장한 건 2018년 8월 김 위원장의 갈마지구 공사장 현지지도 등 손에 꼽힌다. 북한에선 여성들이 공식 행사에 참석할 때 스커트를 입도록 한다. 특히 실무자를 제외한 여성 인사들의 행사장 차림은 치마 정장이 필수다. 옷차림만으로 봐서는 이날의 주빈은 딸이었고, 이들의 가족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누가 퍼스트레이디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김정은 우상화에 부인도 예외 없어 이날 방영된 영상만으론 이설주의 위상이 과거에 비해 낮아진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준공식 참석자들이 여전히 이설주를 예우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직 그의 위상 하락을 단정하기엔 이르다. 정부 당국도 관련 징후가 아직 포착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2023년 2월 인민군 창군 기념 열병식장에서 김정은이 다가오자 이설주가 함께 서 있던 딸의 등을 떠밀며 등장 타이밍을 맞춰 준다거나, 최근 딸의 옷차림이나 행동에 대한 조언을 하는 등 이설주의 역할은 오히려 커졌을 수 있다는 것이다. 보이는 곳에서는 자신을 낮추고,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여전히 ‘입김’을 과시하는 셈이다.
여기엔 김일성의 후처인 김성애가 위세를 뽐내려다 곁가지로 몰렸던 학습 효과도 한몫했을 수 있다. 김성애는 1970년대 초 자신이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내세우려다 빨치산들의 반발을 사 자식들을 모두 해외로 내보내야 했다. 후처이긴 했지만 수령의 부인임에도 김성애는 사망 소식조차 주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김정일 시대 때 북한의 퍼스트레이디는 얼굴도 공개되지 않았다. 납북됐던 신상옥·최은희 부부나 김일성과 돈독한 관계였던 재미교포 박경윤 금강산국제그룹 회장 등 극소수 인사들만이 김정일의 부인 얼굴을 봤을 정도다.
모든 매체의 보도 내용을 사전에 검열하고, 이를 통해 대중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려는 북한 체제의 속성을 고려하면 이설주 미스터리는 어쩌면 자신이 선택한 처세술이거나, 사전에 기획된 연출일 가능성이 크다. 최근 북한이 김정은 우상화에 극도로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부인마저 최고지도자를 저렇게 섬긴다’는 셀프 낮춤을 통한 김정은 띄우기일 수 있다는 뜻이다. 동시에 김일성-김정일-김정은에 이어 어린 딸을 앞세우는 식으로 4대 승계가 당연하다는 일종의 상징 조작일 수도 있다.
서구에서 유학한 김정은은 집권 이후 자신의 여동생을 당 제1부부장에, 북한 역사상 최초로 최선희를 외무상에 앉히는 등 여성을 우대하는 듯했다. 부인의 금성학원 후배들이 주축이 된 여성 악단을 만들어 벤츠 버스를 선물하기도 했다. 하지만 악단은 활동을 멈췄고, 김여정은 2021년 1월 제1부부장에서 부부장으로 한 단계 강등된 이후 직급에 변화가 없다. 일종의 착시 현상이었던 셈이다. 파격적으로 등장한 퍼스트레이디라고 해도 최고지도자의 권위 앞에는 예외가 없는 사회가 ‘수령제 사회주의’인 북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