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부터 정부가 세워진 48년 8월 15일까지 우리에겐 여러 과제가 있었다. 큰 이슈는 친일파 처리였다. 백범 김구(사진)는 강경파로 알려졌다. 그러나 실은 통합주의자에 가까웠다.
원칙은 확고했다. 45년 12월 ‘3000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방송에서 “적지 않은 협잡 정객과 친일분자, 민족반역자들을 숙청해야 한다… 죄악이 많아 용서할 수 없는 불량분자만은 엄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친일파 처리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광범위하게 파급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면구장(면장과 이장) 이하까지 추궁한다면 교각살우(矯角殺牛)의 폐가 있을 것 같다.” (49년 2월 기자회견) “일본이 바로 이웃인데 친일파는 많을수록 좋다. 반민족적 친일파를 처단하라는 것이지, 언제 단순히 친일파를 처단하라고 했느냐.”(백범의 비서였던 고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 회고)
백범은 친일파의 완전한 청산을 부르짖는 이상주의와 ‘건국이 무엇보다 우선’이라는 현실 속에서 절충과 통합을 택한 것 같다. 건국이라는 지상 과제를 이루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선택이었다. 미래를 위한 통합은 지금도 화두다. 그래서 백범의 정신이 새삼 되새겨지는 광복 80주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