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이승우 기자 = "그 무명의 하급 프랑스 정치인에게 주고 싶은 조언은 프랑스인들이 현재 독일어로 말하지 않는 건 오직 미국 덕분이란 점을 상기시켜 달라는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위대한 우리나라에 감사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충직한 '입'인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이 지난 3월 정례브리핑에서 한 말이다. 프랑스 좌파 정당 소속 라파엘 글뤽스만 유럽의회 의원이 트럼프 정부를 비판하며 프랑스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 선물했던 '자유의 여신상' 반환을 요구한 데 대한 반격이었다.
레빗의 주장은 제2차 대전에 미국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독일 치하였던 프랑스는 지금 지도에 없다는 뜻이다. 감정적이고 과격한 대응이었지만 사실이긴 하다. 자존심 강한 프랑스인들이 가장 말하기 싫어하는 대목이니 일부러 아픈 데를 찌른 모양새다. 두 차례 세계 대전에서 독일과 프랑스는 모두 핵심 관련국이었고 1차 대전 역시 미국의 참전으로 프랑스에 불리했던 전황이 바뀌었다. 결과적으로 레빗은 프랑스가 두 차례 국가 생존 위기에서 미국의 도움을 받은 사실을 잊지 말라고 환기한 셈이다.
사실 이 논리는 처음 나온 게 아니다. 미국인의 의식 구조 속엔 이런 생각이 깃들어 있다. 지난 1966년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의 효용성에 회의적 태도를 보이며 탈퇴를 추진했고, 프랑스에 주둔한 미군 철수도 요구했다. 미국은 뒤통수를 맞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당시 미 국무장관이던 데이비드 딘 러스크는 드골을 만나 이런 취지로 물었다고 한다. '당신의 철군 명령에 제1차 대전과 제2차 대전 당시 프랑스 묘지에 묻힌 6만 명 넘는 미군의 시신도 포함되는 겁니까?' 러스크 자서전에 따르면 드골은 질문에 크게 당황해 답변도 하지 못하고 자리를 떴다. 이 질문은 사실 린든 존슨 당시 대통령이 리스크를 드골에게 보내며 직접 주문한 것이라고 한다. "딘, 그에게 그 묘지에 관해 물어보시오!"
2차 대전 전세를 바꾼 1944년 노르망디 작전은 미군 주도로 이뤄진 인류사 최대의 상륙 작전이었고, 미군을 위시한 연합군의 수많은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다. 그 피의 대가로 나치가 점령한 프랑스는 해방됐다. 하지만 이후 미국과 소련 주도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진영으로 양분된 냉전 질서에서 프랑스는 틈날 때마다 독자 노선을 보였다.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에 거부감을 보이며 나토 탈퇴 움직임 등을 통해 서방 진영 대오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은 프랑스를 향해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레빗의 발언에는 이런 현대사 속 앙금이 깔린 셈이다.
인간은 감정적 동물이고 국제사회에서도 이런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 원수에 대한 증오보다 더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는 건 믿었던 사람의 배신이란 점도 우리는 살면서 알게 된다. 냉엄한 국제질서에서 살아남으려면 선과 악의 잣대보다 냉철한 현실적 계산이 우선이란 교훈도 여러 시행착오 끝에 배웠다.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고, 잠시 방심하면 비극의 풍랑에 휘말린다. 미국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외교 전략을 세울 때 고려해야 할 건 미국이 여전히 국제사회를 주도하는 최강대국이고 현재 세계 질서 재구축을 시도 중이며, 우리에겐 유일 혈맹이란 객관적인 외형 요소들뿐이다. 미·중 충돌의 대격변 속에 미국과 관세 협상, 방위비 협상 등 난제를 해결해야 할 당국자들이 상대 의중을 정확히 읽어내는 현명하고 냉정한 대응으로 국민 앞에 좋은 결과물을 내놓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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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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