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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광환 감독을 기리며

OSEN

2025.07.02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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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EN=손용호 기자]

이광환 전 LG 트윈스 감독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며칠 전에 접했는데, 2일 아침에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가 날아왔다.

한국야구의 인재이자 최고의 학구파였던 고인은 동시대에 함께 그라운드에서 뛰었던 후배였고 나름대로 인연이 깊다. 실제 인간적 교류는 많지 않았으나 강병철 감독과 가까웠던 나는 강 감독을 통해서 그에게 좀 더 다가갈 수 있었다.

내가 평가하는 고인은 한마디로 대단히 욕심 많고 꿈이 컸던 친구라고 생각한다. 대구 출신의 고인은 1964년 대구상고 1학년 때, 서울 중앙고로 전학했다. 다음 해 동아일보 주최로 권위 있는 황금사자기 고교대회에서 첫 우승을 했다.

원로야구기자 홍순일 씨가 정성을 다해 편찬한 『한국야구인명사전』에는 야구관계자, 기자, 선수 등 8000여 명 이상 수록돼 있다. 그 사전에 고인의 화려한 야구계 이력이 고스란히 소개돼 있다.

고인은 특히 중앙고 야구선수 시절, 고교야구 최고의 스타임을 입증하는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했고, 고려대, 한일은행 야구부를 거쳐 은퇴 후에 모교인 중앙고 야구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 OB 베어스의 코치로 합류한 고인은 김영덕 감독을 보좌해 팀을 한국프로야구 초대 챔피언으로 이끌었다.

본격적인 프로야구 지도자 변신에 성공한 고인은 코치를 거친 다음 김영덕, 김성근에 이어 감독에 취임한 후 LG, 두산, 한화, 히어로즈 구단 감독을 역임, 명실공히 명감독의 반열에 올랐다.

때로는 코칭스태프와의 불화와 성적부진 등으로 중도에 퇴진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지만 1994년 ‘신바람 야구’의 기치를 내걸고 LG 트윈스를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시키며 올해의 감독상(스포츠서울)도 받는 등 그의 질주는 계속 됐다.

내가 고인을 높게 평가하고, 욕심 많은 지도자로 지칭하는 것은, 그가 야구 지도자 중에서도 가장 성실한 학구파였기 때문이다.

현역 지도자로서 시즌이 마무리된 후나 중도퇴진으로 계약해지가 됐을 때 보통 국내에서 머무르며 다음 자리를 노리는 것이 일반적이나 고인은 그때마다 해외 선진야구를 습득하기 위해 연수를 떠났다. 일본과 미국의 메이저리그 구단 연수도 그렇게 이루어졌다.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명문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 미국 메이저리그 LA 다저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등에서 신생 한국 프로야구 취약점과 문제점을 깊게 비교 분석하는 공부가 이어졌다.

특히 고인은 마운드 운영에서 투수들의 임무 분담을 세분화하여 투수들을 철저히 보호하는, 소위 말하는 스타시스템으로 투수들이 해야 할 일을 확실히 인식시킴으로써 경기의 집중력을 높이고 팀 전력 향상에 큰 발판을 놓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스포츠서울 이종남 기자가 특별한 인간관계로 고인의 야구 철학을 전도하는 데 앞장섰는데, 이른바 자율야구다. 당시만 해도 지도자의 일방적 지시에 따른 피동적 훈련에 익숙했던 선수들이 스스로 연구하는 자세로 탈바꿈하기에는 결코 쉽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사실 객관적으로는 자율야구의 원조가 김응룡 해태 타이거즈 감독이라고 많은 야구인이 말하긴 했다. 김응룡 감독 역시 프로야구 출범 전 미국야구 연수를 다녀오면서 우선 코칭스태프가 먼저 야구장에 나와서 선수들이 불편 없이 연습에 임할 수 있도록 제반 준비하는 모습들을 국내에 전했던 것이다. 평소 과묵한 성품의 김 감독은 철저히 선수들이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유도했다.

어쨌든 고인은 국내외 다양한 야구를 접했고 틈틈이 현장 외적인 야구발전에도 관심을 갖고 무엇보다 실천에 옮겼다. 1995년에는 특별한 연고도 없었고 야구 불모지였던, 스프링캠프지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제주도 서귀포에 자비로 한국 최초의 야구박물관을 개관했다. 메이저리그 연수 때 눈으로 보고 익힌 선진야구를 본 따 느낀 점을 그대로 행동에 옮긴 것이다.

고인은 또한 여성 야구에도 관심을 기울여 한국 여자야구연맹 정진구 회장과 뜻을 같이해 수준을 상당히 발전, 향상시켰다. 서울대 야구부 살리기 위해 무보수로 10여 년간 봉사한 점도 기억에 남는다.

프로야구 지도자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그 열정은 식지 않아 KBO 유소년 육성위원장과 유소년 야구 활성화를 위한 티볼 저변확대를 위해 초중고 교원을 대상으로 티볼을 공급하며 끊임없이 야구발전의 선두에서 활동했다.

무엇보다 한국야구위원회(유영구 총재)와 대한야구협회(강승규 회장) 그리고 서울대학교(이장우 총장)가 손을 맞잡고 산학협력과 공동연구를 통한 야구발전 및 스포츠 산업 발전을 위하여 만든 ‘베이스볼 아카데미’의 설립에 그가 깊숙이 관여해 펼친 봉사와 헌신을 잊을 수 없다.

프로야구 발전과 선수권익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야구 원로와 중견 기자들, 현역감독, 해설자 27인으로 발족한 일구회의 산파 노릇을 맡았던 내가 8, 9대 회장으로 선임되었을 때 고인이 간사로 일하고 싶다고 해서 한팀이 되어 다양한 의견을 교감했던 추억도 떠오른다. 항상 쾌활한 사나이로서, 선후배 관계가 좋은 친구여서 덕분에 일구회가 발전되어 오늘이 있기까지 든든한 초석을 쌓았다고 생각한다.

방송 해설과 신문 칼럼 기고 등 다방면으로 활동했던 고인이 한국프로야구 발전, 특히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유학 후 게임 승패에 7할 이상을 차지하는 투수들의 임무를 완전히 세분화하는 스타시스템 도입은 탁견이었다. 그동안 선발과 마무리 정도로 구분했던 투수들의 임무를 잘게 쪼개어 마운드 운명에 세분화를 꾀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투수 보호에 큰 도움을 주었고, 선수 시절 투수만을 했던 내가 고인을 프로야구 발전에 가장 큰 공로자로 평가하는 이유다.

고인은 강한 근성으로 고집이 세다는 소리도 들었으나 야구 문제에 관한한 끊임없는 논쟁으로 주위와 불화한 적도 있으나 지도자들만 아니라 선수들에게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풍토를 심어준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공로다. 신바람 야구의 기치를 들고 LG 트윈스의 팀 컬러를 변화시키고 1994년에 한국시리즈 챔피언에 등극시킨 점도 그러한 바탕에서 이루어진 그의 커다란 업적이다.

부디 하늘에서 그토록 좋아하던 야구전도사 이종남, 천일평 기자를 만나 한국야구를 지켜보면서 마음 놓고 야구를 즐기시길 기원한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2025년 7월 3일. 김소식(전 일구회 회장) 드림


홍윤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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