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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백의 아트다이어리] 안토니 곰리와 ‘미완의 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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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03 08:16 2025.07.03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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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백 홍익대 교수 미술사·시각철학
지난달 강원도 원주 뮤지엄 산에 개관한 안토니 곰리의 상설 전시관 그라운드(Ground)에 들어섰을 때 그의 익숙한 인체 형상 조각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돔 형태의 반구형 지하 공간은 하늘을 향해 뚫린 원형 창을 통해 낮은 빛을 끌어안고, 그 안에는 숙이거나 엎드린 인간 형상의 덩어리들이 침묵 속에 놓여 있었다. 곰리의 작업은 여전히 ‘몸’이라는 물리적 주체가 공간과 맺는 다양하고 열린 관계를 탐색하고 있었다.

38선 너머 마주보는 인체 조각
끝내 설치 못 하고 영국에 반환
성사됐다면 ‘분단 예술’ 됐을 것

안토니 곰리와의 인터뷰 장면, 2008년, 곰리의 런던 스튜디오. [사진 전영백]
이번에 그는 자신의 일관된 주제인 ‘공간에의 드로잉’이라는 제목에 부응하며 드로잉과 조각, 그리고 설치에 이르는 작업을 선보였다. 드로잉 전시를 보며 나는 문득 오래된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2008년, 런던 킹스크로스 인근 그의 스튜디오에서 곰리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이었다. 인터뷰를 위해 넓은 드로잉 책상 앞에 앉았을 때 놀랍게도 동양화 모필들이 놓여 있었다. 그 연유를 물으니, 그는 주로 동양화 붓으로 드로잉을 한다고 했다. 곰리는 동양 및 인도 문화권에 대해 꽤 익숙했던바, 한·중·일을 수차례 방문하였고 인도의 경우는 1970년대 초, 3년 동안 전문적 명상 훈련을 받은 바 있다고 했다.

그의 작업은 사색적이며 철학적이라는 평을 듣는데, 작가도 인정했듯 그 근본의 상당 부분이 동양 문화와 닿아 있는 듯했다. 그가 흡수한 동양 철학은 몸과 정신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작용한다. 작가는 당시 인터뷰에서 몸을 “정신이 사는 집이며 장소”라 했는데, 자신의 조각은 특정한 사람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삶이 머무를 수 있는 잠재적 장소”를 나타낸 것이라고도 했다. “오늘날 미술이 나아갈 방향이 무엇인가?”라는 나의 질문에 그는 “오늘의 미술은 친밀성과 소통을 복원해야 한다. 지나치게 발달한 문명의 언어는 인간 사이의 감각적 교감을 앗아갔고, 미술은 그것을 되살려야 한다”는 것.

그의 조각은 본래 ‘바디 케이스(Body Case)’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는 자신의 몸을 석고로 캐스팅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데, 주물을 뜰 때면 몸이 세상과 단절되고 미라처럼 봉합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몸을 석고에 갇히게 함으로써 일시적인 죽음을 자초하며 이를 “저승으로의 자발적 여행이자 부활”이라고 설명했다. 숨 막히는 밀실 공포를 느낄 때 “일시적 죽음을 경험”하는 느낌이라는 것. 그의 인체 조각은 체험적인 고립과 단절의 결과물로서 그 존재감을 묵직하게 드러낸다. 그 결과 인간의 실존적 고독과 공간과의 신체적 교감이 작품에 깊이와 밀도를 더 한다.

안토니 곰리 ‘축적하다’, 2011, 주철(Cast Iron), 180x47x50㎝. [사진 타데우스 로팍]
그래서였을까. 그는 한반도를 ‘분단된 몸’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오래전 그는 우리나라에 상당히 중요한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자신의 작품을 헌정한 바 있다. ‘마주 보는 극점(Poles Apart)’이라는 제목의 한 쌍의 인체 조각이다. 이는 남북한이 서로를 향하지만 만날 수 없는 현실을 은유한 인체 형상의 설치작업이었다. 이 작품은 본래 하나는 남측, 다른 하나는 북측에 놓아서, 두 형상이 38선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응시하게 하도록 구상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이런저런 이유로 실행되지는 못했다. 정부의 담당자가 바뀌며 사업이 흐지부지되었고, 한국으로 공수되어 온 그의 조각은 도라산 공원 한구석에 방치되었다. 우리 정부가 세계적 작가로부터 헌정 받은 중요한 작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2010년, 인터뷰의 인연으로 알게 된 내게 곰리 스튜디오로부터 도움을 요청하는 연락이 왔다. 자칫 국제적 미술 스캔들로 번지면서 한국을 예술 후진국으로 실추시킬 수도 있겠다는 우려가 들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작품 관리 및 소재에 대한 파악, 그리고 담당 공무원에 대해 추적을 했고 끝내 작가와 통일부 담당자 사이를 중재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프로젝트는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다 그의 작품은 2011년 가을, 10여년 만에 조용히 영국으로 반환되고 말았다.

그때의 프로젝트가 성사되었더라면 어땠을까 돌이켜본다. 모르긴 몰라도 그의 헌정 작품이 우리나라 고유의 랜드마크로 떠오르며 세계적인 주목을 끌었을 것이다. ‘마주 보는 극점’은 비록 그의 스튜디오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그곳에서도 분단된 한반도를 향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노병이 돌아오듯, 작가는 다시 한국에 와서 7점의 인체 조각을 상설로 설치했다. 전시장을 나오며 옛날 그 ‘미완의 프로젝트’의 한 축이나마 복원되는 느낌이 들었다.

전영백 홍익대 교수, 미술사·시각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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