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서울 양천구 목동의 한 카페에서 대한성공회 윤종모(75) 주교를 만났다. 상담심리학 전문가인 그는 은퇴한 후에도 사람들에게 ‘가족 간 대화법’을 설파하고 있다. 가족은 세상에서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 같지만, 한 꺼풀 벗겨서 보면 세상 누구보다 갈등을 겪는 사이일 때도 많다. 그에게 가족 간 대화법을 물었더니 영국 이야기부터 꺼냈다.
Q : 왜 영국인가.
A : “영국은 정부 부처 중에 ‘고독부(Ministry of loneliness)’가 있다. 2018년에 설립됐다. 왜 생겼겠나. 국가 차원의 문제가 된 거다. 그럼 한국은 어떤가. 우리 사회도 현대인이 겪는 외로움이 많다. 자살률도 높다. 우울증 걸린 사람도 많고, 좌파·우파 간 갈등도 심하다. 한마디로 마음 건강의 질이 취약한 사회다. 가족 간 대화법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인간 관계에서 오는 외로움 가장 커
Q : 왜 무관하지 않나.
A : “가족 간에도 소통이 안 되면 외로움이 생긴다. 현대인의 외로움. 원인은 여럿이다. 그중에서도 인간관계에서 오는 외로움이 가장 크다. 두 사람이 소통할 때 무엇으로 하나. 말과 말로 한다. 그게 겉으로 드러난 표층구조다. 그런데 말로 표현되지 않은 내면의 소통 구조가 있다.”
‘나를 중요한 존재로 여겨다오’
인간은 누구나 인정 욕구 있어
대화로 충족 안 되면 고독 느껴
“사랑한다”고 명확히 표현해야
윤 주교는 “표층구조에서 문제가 없어도, 심층구조에서 문제가 생길 때가 많다”며 예를 하나 들었다.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를 자주 오가며 글을 쓰는 친구가 있다. 하루는 러시아에서 한국에 있는 아내에게 오랜만에 국제 전화를 했다. 강아지 밥은 줬느냐, 화분에 물은 줬느냐고 물었다. 아내는 한참 듣고 있더니 ‘당신 참, 해도 너무 하네요’ 하면서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며 친구는 내게 상담을 요청했다.”
Q : 무엇이 문제인가.
A : “친구에게 물었다. 왜 전화했느냐. 아내가 보고 싶어서. 그럼 그 말을 하지 그랬냐. 보고 싶다고. 아, 강아지 밥 잘 줬느냐는 말이 그 말 아니냐. 친구는 그렇게 답했다.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대화의 심층구조에서 틀어졌기 때문이다.”
Q : 어떻게 틀어진 건가.
A : “인간에게는 본능적 욕구가 있다. 나를 좀 중요한 존재로 여겨다오. 이건 말로 표현되진 않았지만, 두 사람 대화의 심층에서 흐르는 강력한 파장이다. 인간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 무언가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심층의 욕구가 있다.”
Q : 그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A : “이게 충족되지 않을 때 인간은 외로움을 느낀다. 부부 사이도 그렇고, 부모와 자식 사이도 그렇다.”
윤 주교는 상담학 교수였다. 교회를 비롯해 일선 현장에서 숱한 상담 경험이 있다. “부부간에 갈등이 있을 때, 대부분 사람은 ‘성격 차이’라고 말한다. 상담을 하다 보니 알겠더라. 성격 차이보다 대화의 기술이 부족해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더 많았다. ‘나를 좀 중요한 존재로 여겨다오.’ 이 심층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아서 문제가 생길 때가 더 많더라.”
행복 능력의 10%도 안 쓰고 있어
Q : 그걸 채워주는 대화의 기술이 뭔가.
A : “간단하다. 보고 싶다고 말하면 된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된다.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말하면 된다. 우리 사회는 유교적 전통이 강하다. 그런 표현에 인색할 때가 많다. 그런데 현대인은 그걸 요구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 내 안의 행복 감정에 스위치가 켜지기 때문이다.”
이말 끝에 윤 주교는 아인슈타인 이야기를 꺼냈다. “아인슈타인은 인간의 총 능력을 100으로 본다면, 우리가 쓰는 건 10%도 안 된다고 했다. 그럼 지능만 그럴까. 나는 행복 감정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의 총 능력이 100이라면, 우리는 채 10%도 안 쓰고 있다. 행복 감정은 상대방이 나를 중요한 존재로 인정할 때 비로소 활발해진다.”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다. 윤 주교는 “자신의 손으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최후의 감정이 뭔지 아나. 다름 아닌 ‘고독’이다. 고독이 뭔가. 내 주위에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다. 그럴 때 느끼는 외로움, 그게 바로 고독이다”고 말했다.
윤 주교는 상담학에 나오는 짧은 사례를 하나 소개했다. “미국의 어느 부인이 남편과 10년째 각방을 쓰고 있었다. 결국 이혼을 결심했다. 교회 목사를 찾아가 1시간 동안 상담을 했다. 목사가 들어 보니 부인은 1시간 동안 남편에 대한 원망만 늘어놓았다. 목사는 1주일 뒤에 다시 만나자며 숙제를 하나 내주었다.”
Q : 무슨 숙제였나.
A : “오늘 저녁에 남편이 퇴근해서 오면, 남편의 좋은 점이나 고마운 점을 하나만 꼭 이야기하라고 했다. 그날 저녁, 퇴근한 남편이 거실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마땅히 할 말도 없고 해서, 부인은 미국의 경제 대공황 때 이야기를 했다. ‘여보, 대공황 때 당신이 가족을 먹여 살리려고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퇴근한 일이 기억나네요. 피곤한 모습으로. 그때 참 고맙게 생각했어요.’ 남편은 신문을 보다 말고,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아내를 한참 바라보았다. 좀 있더니 남편의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부인은 1주일 후에 목사를 찾아가 상담할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윤 주교는 “부인의 한 마디가 남편이 소중한 존재란 걸 일깨워 주었다. 이게 간단한 말 같지만, 여기에 굶주려 있는 사람에게는 엄청난 위력이 있다”며 “‘나를 좀 중요한 존재로 여겨다오.’ 이건 가족 간 대화법에서 결코 잊어선 안 될 핵심 포인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