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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출신 총리 세운 이승만…초대내각 '친일'은 단 셋 [창간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 ④]

중앙일보

2025.07.03 13:00 2025.07.03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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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트리거 60' ④ 1948년 정부수립

1948년 8월 5일 첫 국무회의를 마친 대한민국 정부 초대 내각. 무임소장관 2명(지청천, 이윤영)은 사진에서 빠졌다. 앞줄 왼쪽부터 전진한, 임영신, 안호상, 이인, 이범석, 이승만, 윤치영, 김도연, 조봉암, 장택상. 뒷줄 왼쪽부터 윤석구, 김동성, 민희식, 유진오. [사진 이승만연구원]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감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조국 독립에 대한 기대는 높았지만 정작 한국인이 마주한 건 냉혹한 국제 현실이었다. 이튿날 16일 자 매일신보에는 “미국·영국·중국·소련 4대국의 결정을 받아들인다”는 히로히토 천황의 칙어와 마지막 조선 총독을 지낸 아베 노부유키의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서슬퍼런 경고문이 머리기사로 실렸다. 그 뿌리는 멀리 카이로선언(1943)에 담긴 조선의 신탁통치를 수용한다는 의미였다.

이후 남한에는 미군정(1945~48)이 들어섰고, 북한에는 소련의 등에 업힌 김일성이 권력을 잡았다. 미군정 기간, 남한에서는 신탁·반탁을 둘러싸고 혼란이 빚어졌다.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마치 ‘한 병 안에 든 전갈’처럼 싸움이 일어났다. 당시 미국에서 돌아온 이승만은 탁치(託治)나 미소(美蘇)공위의 협상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단정(單正)으로 가는 미국의 정책을 간파하고 있었고, 1946년 6월 3일 전북 정읍에서 “남측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자”는 의도된 발언을 했다.

격동의 시대에는 성인 남자 모두가 정치인이었다. 1946년 1~2월 미소공위가 한국의 통일 방안을 논의하고자 협상 단체를 모집했을 때 정당·사회 단체가 463개였으며, 회원 숫자가 7000만명이었다. 1946년 남한의 인구가 1900만명(조선일보 1947.7.13), 정당·사회단체에 가입할 수 있는 성인 인구가 800만명, 여기에 교섭에서 거의 배제된 여성을 제외한다면 실제 정치에 참여한 인구는 400만명 정도였음을 고려할 때 모든 성인이 18번 정당 사회단체에 가입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로써 미소공위도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 유산은 이승만에게 그대로 전수됐다.

미군정 기간 한국은 주권국가가 아니었다. 극도의 혼란스러운 3년이 지나고, 1948년 8월, 군정이 정권을 이양했다. 정부 수립의 핵심은 헌법 제정에 이어 각료를 임명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이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대통령에 지명될 때만 해도 그에 반대하는 세력이 없었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그를 탄핵(1925)하면서 임정과 이승만은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넜다.

정부 수립 핵심 초대내각 구성 난항
이승만은 임정에 독립운동 자금 지원을 약속했지만, 그의 미국 생활은 그럴 만큼 넉넉하지 않았다. 무장투쟁론자인 박용만의 도전, 안창호의 이른 죽음, 엘리트 의식, 심한 낯가림 등 그는 겉으로 보기와는 달리 외로웠고, 명성에 견주어 인맥이 두터운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한 현상은 막상 대한민국 첫 대통령에 취임해 내각을 꾸릴 때 현실로 나타났다.

많은 고민과 우여곡절 끝에 첫 조각(組閣)이 이뤄졌다(그래픽 참조). 장관은 임명했지만 일이 뒤바뀌어 먼저 해야 했을 총리 임명이 난항이었다. 이승만은 같은 서북 출신이며 감리교 목사인 국회의원(종로) 이윤영을 선호해 총리로 임명했으나 반대의 목소리가 컸다. 그가 제헌국회 개막식에서 한 건국 축하 기도와 리무라 죠사케(李村允榮)라는 창씨개명이 구설에 올랐다. 이승만은 거듭 인준을 요청했으나 국무총리는 자기들의 몫이라고 여겼던 한민당의 반대(68%)로 부결됐다.

박경민 기자
이승만은 한민당에 불쾌감을 표시했고, 대척점에 있던 임시정부 광복군 참모장 출신의 이범석을 총리로 임명했다. 이범석은 이미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된 터였다. 임정 주석을 지낸 김구와 더는 화목하게 같은 행보를 할 수 없는 터에 이범석을 총리로 임명하는 데에는 많은 고려와 고민이 있었다. 광복군 사령관을 지낸 지청천이 무임소장관인데, 그의 부하인 참모장이 총리로 임명됨으로써 임정 세력은 혼란스러웠다. 그것도 이승만의 계산에 들어 있었다.

김구는 당초부터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김구를 “괭이질이나 할 사람”(한독당 중구부녀부장 『김선 회고록』)으로 여겼다. 그러던 터에 장덕수의 암살로 두 사람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중도파를 고려할 처지도 아니었다. 격동기의 중도파는 늘 회색분자로 여겨져 누구의 총에 죽을지 몰랐다. 실제로 송진우·여운형·장덕수 등 중도파들은 비극적 최후를 맞았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김규식도 좌우로부터 견제를 받아 권력의 주변에서 겉돌았다. 동서고금이 늘 그렇듯이, 중도파가 설 땅이 없었다는 것이 해방정국에서 큰 비극이었다.

초대 내각을 두고 후대의 역사에서 논쟁이 계속됐다. 그 핵심은, 과연 이승만의 초대 내각이 친일적이었는가 하는 ‘몽환적’ 주홍글씨에 대한 검토다. 〈그래픽〉에서 보듯이 국무위원 의석은 16석이었지만, 이범석이 국무총리와 국방부 장관을 겸임하고 있었으므로 국무위원 숫자는 15명이었다. 이 가운데 명징하게 친일 인사로 분류할 수 있는 인물은 일제 황민화(皇民化·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 요구) 정책의 앞잡이였던 임전보국단(臨戰報國團) 부인대(婦人隊)의 임영신, 임전보국단 발기인 윤치영, 그리고 친일문학자 유진오 등 3명뿐이었다. 의석수로 보면 18.8%요, 인원으로 보면 20%다. 미군정 시절 하지(J R Hodge) 사령관이 푸념했듯이, 사람을 쓰려니 친일의 흠결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거의 없고, 이승만으로서는 우국지사만으로 조각할 수도 없던 실정을 고려한다면 18.8~20%는 높은 비율이 아니다. 그 시대에 처가 3대, 외가 3대, 친가 3대 9족에 친일 인사가 없는 가정은 노예나 화전민이 아니면 ‘거의’ 없었다.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꿈꿨던 이승만
이승만의 초대 정부를 놓고 피해 갈 수 없는 또 다른 화두는 건국절 논쟁이다. 건국이란 시민혁명을 거쳐 봉건 왕조가 공화정으로 국가 체제를 바꾼 경우이거나, 아니면 ‘오랜’ 식민지 시대를 겪다가 양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독립해 신생 국가를 창립했을 때 쓰는 용어다. 따라서 1948년 8월 15일은 국가창설일로서 건국이라는 용어를 쓸 수 있다.

그렇다면 1919년 임시정부 선포는 어찌 되는가. ‘해방은 시켜주되 독립을 시켜 줄 수 없다’는 역사학자 토인비(A J Toynbee·1945년 2월 미국·영국·러시아 정상이 모인 얄타회담 당시 영국 측 조사원)의 보고서(1945)나, ‘한국에는 영토도 없고, 국민도 없고, 주권도 없다’는 미군정청 고문 프랭켈(Ernst Fraenkel)의 ‘미군정 설립 보고서’(1948)처럼, 당시 4대 강국은 한국의 ‘독립’을 고려한 적이 없었다. 한국 현대사를 공부하는 애국주의나 가슴으로 한국사를 쓴 역사학자들은 해방과 독립을 혼동했거나 동일하게 생각했다는 점에서 오류다.

그러므로 1919년 4월 11일의 임시정부 수립 선언은 말 그대로 임시정부의 수립일 뿐이다. 주권도 없고, 국민도 없고, 영토도 없는 상황에서 국가를 창설했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학술적으로 무리가 있다. 이 문제는 경제학자 마셜(Alfred Marshall)의 말처럼, 뜨거운 가슴으로 생각할 일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로 생각할 문제다. 애국주의자들의 열혈한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역사에는 가슴으로 산 사람이 머리로 산 사람을 이긴 사례가 드물다. 김구와 이승만의 대립과 파국이 대표적이다. 격동기의 정치인들은 열혈한 민족주의자였지만, 우국주의는 분노와 슬픔과 회한의 시대에 그 나름대로 가치와 역할이 있었으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이성과 논리와 사료의 시대다.

그렇다면 이승만의 초대 정부의 유산은 무엇일까. 그 시대,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사상적으로 고뇌가 많았다. 이승만의 경우, 기본적으로 그는 유교의 왕조적 사고를 바탕에 깔고 있어, 실수인 체 “과인(寡人)”이나 “나의 백성”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기독교적 자애와 미국식 자본주의를 봉합하려다 보니 그 자신도 정체성에 혼란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그 시대의 정신을 개념화하자면, 이승만의 유산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의 이상이 끝까지 지속했는가의 질문과는 별개로 적어도 1948년의 상황에서는 그러했다.

☞트리거=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든 결정적 계기들을 ‘트리거’라 이름 붙였다. 중앙일보는 창간 60주년을 맞아 광복 후 있었던 60개의 트리거를 선정, 역사와 의미를 연재 중이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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