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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우리들의 이야기 속에서 익어간다. 쌀, 누룩, 물이 담긴 항아리는 발효의 시간을 거쳐 탁주, 약주, 증류주를 우리에게 내놓는다. 최근 전통주 시장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현재 국내 전통주 양조장은 1500여개에 달한다. MZ 세대는 새로 출시되는 전통주를 얻기 위해 오픈런도 불사한다. 전통주의 매력은 무엇일까? 계절, 장소, 사람과 함께 익어가는 술도가들을 소개한다. 첫 번째 주인공은 국내 첫 누룩 명인 한영석이다.
" 소주 석 잔 주량이 빚는 전통주“ "
갑작스러운 척수염은 중년의 건장한 사내를 주저앉게 만들었다. 여정의 시작은 건강한 먹거리를 찾기 위함이었다. 자연의 먹거리와 발효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염증에 좋다는 발효 식초로 시작해 누룩을 연구하던 한영석은 그렇게 전통주에 빠져들었다. "좋은 식초는 좋은 술에서 나오고, 좋은 누룩이 좋은 술을 만들더라" 그때부터 누룩을 연구하기 시작해 지난 2020년 국내 첫 전통 누룩 명인이 되었다. ‘한영석의 발효연구소’ 한영석 대표(55)는 아이러니하게도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소주 석 잔이 주량이다. 스스로 맛볼 수 있는 양이 애석하리만큼 적어서일까? '한 모금을 마셔도 계속 생각나는 술'을 가장 전통의 방식으로 만들기 위해 온 몸을 던졌다.
" 배치마다 맛이 다른 청명주” "
누룩은 술의 씨앗이다. 자연에서 발생한 수많은 미생물이 스며들어 술의 맛과 향을 풍부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2017년 그가 연구소를 세울 당시 전통주를 연구하는 사람들조차 전통 누룩으로는 상업양조가 힘들다고 했다. 누룩취(냄새) 때문이다. 많은 전통주 양조장에서 입국(쌀에 단일 곰팡이균을 배양한 것)이나 개량 누룩으로 술을 빚는 이유다. 하지만 한 대표는 오히려 전통누룩으로 문헌상의 청명주를 재현하는데 승부를 걸었다.
한 대표의 누룩은 법제부터 발효까지 약 50일이 소요된다. 일반 누룩이 20일 만에 발효를 마치는 것에 비해 긴 시간이다. 그가 직접 고안한 누룩실에서는 초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약 90일간의 온도와 습도, 바람과 산소량 등의 조건이 연중 반복된다. 공기 중의 곰팡이가 자연스럽게 누룩에 내려앉기에 안성맞춤인 계절의 조건을 만든 것이다. 발효는 전통방식 그대로다. 과거 발효가 잘되는 계절에만 누룩을 만들고 술을 빚던 것이 한 대표의 누룩실에서는 일 년 내내 가능해졌다.
청명주는 한영석을 대표하는 술이다. 찹쌀로 빚어 기분 좋은 신맛과 은은한 단맛이 특징이다. 청명주는 24절기 중 하나인 청명(淸明)에 빚어 단오에 마신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익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나는 평생 청명주를 가장 좋아하며, 혹시나 잊어버릴까 해서 청명주의 양조 방법을 기록해 둔다"며 청명주를 최고의 술로 꼽았다.
한영석 청명주는 300번이 넘는 실패를 딛고 태어났다. 실패할 때마다 조금씩 더 좋은 술로 진화했다. 약 15t의 연습작을 버리고 나서야 제대로 된 술을 만들어졌다. 산미를 위해 특히 쌀을 대하는 방식을 달리한다. 쌀을 5일 이상 물에 담가 살짝 삭히는 산장(酸漿)법을 한다. 전체적인 풍미는 저온발효로 맞춘다. 60일간 저온에서 서서히 발효시켜야 깊고 다양한 풍미가 나온다. 저온발효는 효모 하나만 튀지 않게 하기도 한다. 효모의 개성이 너무 강하면 다른 미생물들이 힘을 쓰지 못한다.
그의 청명주는 같은 재료로 한 곳에서 띄운 누룩을 사용한 ‘배치(Batch)’ 상품으로 출시된다. 같은 술이어도 배치마다 향과 맛이 미세하게 다르다. 배치마다 누룩 재료(녹두와 찹쌀)의 비율은 물론 쌀누룩, 향미주국, 녹두국 등 다른 누룩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한 배치당 5000~7000병씩 생산하는데, 특성상 한번 지나간 배치는 다시 만들지 못한다. 마니아들이 가장 탄식하는 부분이다. 현재 19배치까지 나왔다.
술은 세 번에 나눠 마셔야 제대로 된 풍미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눈으로 관찰하고, 코로 향을 맡고, 입으로 삼키는 것으로 완성된다. 얼마 전 연구소를 방문한 프랑스 와이너리 관계자는 2024 우리 술 품평회에서 약·청주 부문 대상을 받은 백수환동주를 시음하고는 “정말 포도가 들어가지 않은 술이 맞느냐?”라고 수차례 묻기도 했다고 한다. “전통누룩으로 와인, 사케를 넘어서는 풍미를 만들 자신이 생겼다”는 그의 다음 목표는 전통주 국주(國酒)를 만들어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