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태국 정국 혼란 때마다 되살아나는 '쿠데타 망령'
패통탄 총리 해임 위기에 또 쿠데타설…"근본적 정치 개혁 필요"
(방콕=연합뉴스) 강종훈 특파원 = 지난해 8월 37세 나이에 태국 역대 최연소 총리가 된 패통탄 친나왓은 "아버지나 고모 같은 운명을 맞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버지 탁신 친나왓 전 총리는 2006년 쿠데타로 축출됐고, 고모 잉락 친나왓 전 총리는 2014년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임됐다.
15년간 해외 도피 생활 끝에 2023년 귀국한 탁신 전 총리도 딸의 정치 경력이 자신처럼 끝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실은 패통탄 총리의 다짐, 탁신 전 총리의 확신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패통탄 총리는 취임 10개월여 만에 낙마 위기에 처했고, 태국 정치는 또다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혼란에 빠져 있다.
국경 분쟁 상대국인 캄보디아 실권자인 훈 센 상원의장에게 '삼촌'이라고 부르며 자국군 사령관을 험담한 통화 유출로 패통탄 총리는 벼랑 끝에 내몰렸다.
헌법재판소는 훈 센 의장과의 통화가 헌법 윤리를 위반했는지 판단해달라는 보수 진영 상원 의원들의 청원을 받아들이며 판결 때까지 패통탄 총리 직무를 정지시켰다.
'아빠 찬스'로 총리가 된 패통탄은 '삼촌 찬스'로 캄보디아와의 갈등 상황을 타개해보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최악의 수가 됐다.
협상 전략이라고 해명하며 대국민 사과하고 수습에 나섰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패통탄 총리 지지율은 9%대로 급락했고, 1만명 넘는 군중이 모여 총리 퇴진을 요구했다.
야권은 총리 불신임안 제출을 예고했고, 의회 조기 해산을 압박하고 있다.
탁신 전 총리도 왕실모독죄 혐의, '병실 수감' 특혜 논란으로 재판받아야 한다.
기세등등하던 탁신 부녀는 사면초가에 몰렸고, 태국 정치권 혼란은 가중되고 있다.
태국에서 정정 불안이 확대되면 나타나는 고질병도 다시 도지고 있다.
정권이 위기에 몰리면서 정국이 불안정해지자 또다시 쿠데타설이 나돈다.
당장이라도 쿠데타가 일어날듯한 기류에 오히려 군이 "민주주의 원칙을 수호한다"는 입장을 냈다.
그럼에도 총리 퇴진 시위를 주도하는 친군부 보수 인사는 "국가적 위기에 군이 움직인다면 반대하지는 않겠다"고 쿠데타를 부추기는 듯 말했다.
과거에도 정치적 불확실성 확대 속에 격화한 거리 시위와 충돌로 인한 혼란은 태국 군부 개입의 촉매가 되곤 했다.
태국에서는 1932년 입헌군주제 전환 이후 군부 쿠데타가 19번 발생해 12번 성공했다.
마지막으로는 2014년 쁘라윳 짠오차 당시 육군참모총장이 쿠데타를 일으켜 총리가 됐고, 2023년 총선 패배로 9년 만에 물러났다.
보수 세력 입김이 작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사법 기관도 태국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일부에서는 이를 '사법 쿠데타'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패통탄 총리의 전임인 세타 타위신 총리도 지난해 8월 취임 1년 만에 헌재 해임 결정으로 물러났다.
이번 혼란의 표면적 원인은 자국군을 비판한 패통탄의 실언과 이를 이용한 훈센의 통화 유출이지만, 반복되는 정치 불안의 근본적 원인으로는 취약한 태국 민주주의 기반이 꼽힌다.
군부와 사법 기관 등 기득권 세력이 쿠데타와 법적 조치로 선출된 권력을 무력화하는 역사가 태국 정치에서 반복돼왔다.
2023년 총선에서 최다 의석을 얻은 개혁 성향 전진당은 해산됐고, 총리 후보였던 피타 림짜른랏은 10년간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탁신 세력과 친군부 진영이 손잡은 현 정권은 탄생 과정부터 갈등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탁신 전 총리가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프아타이당이 원수지간이었던 친군부 보수 진영과 결탁해 '정치적 거래'로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쁘라윗 와따나숙 태국 탐마삿대 교수는 AP통신에 "근본적 개혁 없이는 어떤 정부든 태국 민주주의 발전을 반복해서 방해해온 동일한 세력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국민이 선출한 대표가 권한을 행사하는 민주주의 기본 원칙이 지켜지는 방향으로 정치 개혁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쿠데타 망령'이 사라지기 어렵다는 지적도 되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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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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