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육아에 지치면 유모차를 끌고 나와요. 산들바람 아래 코블스톤(cobble stone·자연석)을 걸으면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3일(현지시각) 오전 7시 오스트리아 비엔나 마리아힐퍼 거리에서 만난 싱글맘 애나(35)는 이렇게 말했다. 그에게 이 거리는 단순한 통행로가 아니다. 노천카페(샤니가르텐·schanigarten)에서 커피를 마시거나, 거리 악사가 연주하는 곡을 들으면서 육아라는 ‘폐쇄된 일상’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다.
다수의 비엔나 시민이 매일 찾는 마리아힐퍼 거리는 공공 공간 사업의 일환으로 비엔나시가 2014~2015년 1.8㎞ 구간에 조성한 보행자 중심 공간이다. 친환경 건축물과 거리 전체를 하나의 ‘공공디자인 브랜드’로 구현했다.
마리아힐퍼 거리 조성한 비엔나市
비엔나처럼 서울에도 보행로는 많다. 하지만 마리아힐퍼 거리와는 분위기가 다소 다르다. 썬캡이나 얼굴 전체를 가리는 페이스 커버 모자를 쓴 시민들이 동네 운동장이나 아파트 단지를 뱅글뱅글 도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쉼'과 '콘텐트'로 채워진 보행 친화 거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1960~80년대 산업화·도시화 과정에서 급속히 팽창한 서울은 보행자보다는 차량 통행이 우선이었다. 도로 설계의 기본 전제가 차량 흐름을 원활히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마리아힐퍼 거리처럼 넓은 보행공간을 확보하려면 상업가로의 도로 폭을 축소해야 하는데, 이 경우 토지·상가 소유권자와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문제점을 인식한 서울시는 ‘디자인 스폿 도시경관 개선 사업’을 통해 보행 중심 거리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자치구 공모사업을 통해 2009년 이후 73개소에 보행 중심 거리를 조성했다.
하지만 사업 이후에도 시민이 변화를 체감할 수 있는 거리는 많지 않다. 그나마 서울시가 4억원을 지원해 조성한 서울 용산구 만리시장 일대도 사정은 비슷하다. 기존 1.1~1.5m였던 보행로 폭을 2~2.5m로 확대하고 바닥 포장을 교체했지만, 여전히 일부 상인들은 보행로에 물건을 쌓아두고 있다.
같은 사업지로 선정된 서울 중구 북창동 먹자골목이나 명동 관광특구도 마찬가지다. 서울시 지원을 받아 광고물·조명·보도 등 가로환경 정비는 이뤄졌지만, 마리아힐퍼 거리와 달리 일상을 즐기는 시민은 찾아보기 힘들다. 서울 보행로의 주인은 번잡한 상가·가판대나 호객행위를 하는 상점 관계자다.
도심 흉물 전락한 서울로7017과 대조
비엔나와 서울은 뭐가 달랐을까. ‘디자인 스폿 도시경관 개선 사업’을 비롯한 서울의 보행 정책은 주로 지방자치단체가 주도해 설계한다. 일단 서울시·자치구가 정책 청사진을 선보이면 이로 인해 재산권을 침해받을 수 있는 상인·주민이 반발하고, 결국 화려했던 청사진이 축소되거나 중단하는 패턴이 반복한다.
이와 달리 비엔나시는 마리아힐퍼 거리 조성 사업을 주민투표로 결정했다. 당시 4만900여명의 비엔나시 제6구(마리아힐프)·제7구(노이바우) 거주자 전원에게 우편으로 설문지를 보내 ▶차량 통행 제한 ▶자전거 통행 제한 ▶보행 중심 거리 계획에 대해 각각 찬반 의견을 물었다. 투표율 68.1%, 찬성률 53.2%로 보행 중심 거리 전환을 결정한 이후 착공해 거리를 조성했다.
양 도시의 또 다른 차이는 정책의 목표에서 찾을 수 있다. 서울시가 추진하는 보행로 정비는 주로 간판 정비나 보도블록 교체 정도에서 머문다. 그로 인해 대대적인 정비를 하더라도 사람이 오래 머물 수 없는 구조에 그치는 경우가 있다. 서울시가 서울역 고가를 리모델링해 조성한 서울로7017이 대표적이다.
▶‘600억원짜리 육교’ 전락…서울로7017 철거하나
이에 반해 비엔나시는 차량 중심이던 도로를 보행자·자전거 이용자 중심으로 완전히 재설계했다. 미관 개선 수준을 벗어나 벤치·쉼터·녹지를 조성해 시민이 편안히 머물다 갈 수 있는 공간으로 도시 기능을 재배치했다.
대중교통·자전거·상권 정책도 온도 차가 있다. 마리아힐퍼 거리는 기존 트램·지하철과 연결해 도심 대중교통 환승이 용이하다. 반면 서울로7017은 진입하려면 지하철역에서도 한참 걸어가야 한다. 막상 올라서도 여름철이 되면 콘크리트 복사열 때문에 덥고 겨울이면 눈이 내려 미끄럽다.
이밖에 자전거 도로와 주차 공간을 재배치했고, 상점으로 물건을 실어 나르는 물류 차량 통행 시간대를 설정해 상인 반발을 줄였다는 점도 마리아힐퍼 거리의 특징이다.
마리아힐퍼 거리는 이제 일평균 보행자 수가 2만5000여명(평일)~7만여명(주말)에 달하는 보행 명소로 자리매김했다. 시민 평가도 긍정적이다. 거리 조성 사후 같은 시민을 대상으로 진행한 만족도 조사에서 찬성률이 71%로 상승했고, 보행자가 늘어나면서 상인 매출도 약 38% 증가했다. 환경디자인연구협회(EDRA)가 2017년 선정한 좋은장소상(Great Places Awards)에서 장소디자인상(Place Design Award)도 받았다.
이병훈 아키텍처인프로그레스 건축가는 “비엔나시가 마리아힐퍼 거리를 보행자 전용 도로로 변경하는 방안을 추진할 땐 상인들이 반대했지만, 결과적으로 상업이 살아나면서 이젠 상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며 “비엔나 시민 삶의 질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