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스퍼드대 도서관 소장 문헌 '동사 하다의 종결형'…800가지 변형
활용형 하나당 영어 정의와 설명·한국어 예문·영어 번역 담아
"성공회 초기 한글성경 연계 교재"
하옵고·하였나니…개화기 외국인이 공부한 동사 '하다' 활용 희귀본
옥스퍼드대 도서관 소장 문헌 '동사 하다의 종결형'…800가지 변형
활용형 하나당 영어 정의와 설명·한국어 예문·영어 번역 담아
"성공회 초기 한글성경 연계 교재"
(런던=연합뉴스) 김지연 특파원 = '하거니말거니, 하나이다, 하노라고, 하려니와, 하시오이다, 하여시면, 하엿겟시닛가, 하엿나니, 한들, 한지라, 할가보다, 할낙말낙하다, 할지어다, 합더이다, 합쇼…'
우리말 동사 '하다'에 다양한 어미를 붙인 800여 가지 활용형을 한글과 영문으로 풍성하게 정리한 19세기 말 희귀 문헌이 영국에서 재조명된다.
영국 명문 옥스퍼드대의 중앙 도서관인 보들리언 도서관이 소장한 1896년의 책 '동사 하다의 종결형(Terminations of the Verb Hada)'이다.
6일(현지시간) 학계에 따르면 가로 17㎝, 세로 21㎝ 크기에 총 116쪽으로 구성된 이 책은 '하다' 동사의 활용만 집중적으로 다룬 문법서로, 개화기 선교사를 중심으로 한 영어권 화자의 한국어 초기 연구사를 보여주는 희귀한 자료로 평가된다.
책 표지에는 '비공개 열람용'이라고 찍혀 있어 다량 유통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도 이 책 인쇄본으로 현재까지 존재가 확인된 것은 보들리언 도서관 소장본이 세계에서 유일하다고 여겨진다.
이 책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사서 하니 라일리 옥스포드대 위클리프홀 도서관장 겸 얀튼매너 라니어 신학 도서관장은 연합뉴스에 "'하다'라는 동사 하나만 심층적으로 분석한 특별한 책"이라고 소개했다.
한국계인 라일리 관장은 "깊이 있는 지식을 얻고자 하는 비(非)한국어 화자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며 "저자가 한국어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지식과 언어적 능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책에는 '하다'의 활용형 하나당 영어 정의와 설명, 한국어 예문과 영어 번역이 제시돼 있다.
예를 들어 '하리오'에는 'How to do'라는 영문 설명과 함께 '엇지하리오. How shall I do'라는 한글 예문과 영문 번역이 달려 있다.
'하옵고'에는 'Polite reply from an inferior to a superior'(윗사람에 대한 아랫사람의 공손한 답)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한들'에는 'In spite of being done'이라는 영어 설명과 함께 '설워한들슬데잇나'(서러워한들 쓸 데 있나), 'Though you sorrow you sorrow in vain'이라는 예문이 한글과 영어로 적혔다.
한국어에서 어미를 달리 붙임으로써 동사의 기능과 의미는 물론이고, 화자와 청자의 관계까지 달라지는 것을 외국인에게 최대한 세세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어간에 접사를 결합하는 교착어인 한국어과 형태 변화가 드문 고립어인 영어의 차이로 영어권 화자에게 온전한 한국어 습득이 얼마나 어려웠을지도 엿볼 수 있다.
책에는 저자와 출간 주체에 대한 정보는 찍혀 있지 않으나 19세기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한 영국성공회 조선교구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표지 제목 아래에는 '루멘(Lumen)에 나오는 동사 종결어미 일부를 때때로 참조하여'라는 부제가 달렸고, 실제로 여러 활용형에 '루멘의 몇 장 몇 절을 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루멘'은 대한성공회의 초기 성서인 조만민광(照萬民光·Lumen ad Revelationem Gentium)을 가리키는 것으로 라일리 관장은 분석했다.
'조만민광'은 초대 성공회 조선교구장인 찰스 존 코프(고요한) 주교가 1891년 조선에 인쇄기를 들여와 인쇄소 운영을 시작하고 나서 1894년 사도신경을 중심으로 편찬한 한글·한문 병용 발췌 성경이다.
제3대 조선교구장이 되는 마크 트롤로프 주교가 '조만민광' 편찬 작업에 참여했는데, 트롤로프 주교가 여러 문서에서 '조만민광'을 '루멘'으로 칭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책에서 어떤 구절을 참조하라고 언급한 '하다'의 변형은 조만민광 속 해당 구절에 그대로 들어 있다.
라일리 관장은 "'조만민광'이 출판되고 이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하다'가 같이 출판됐다고 본다"며 "트롤로프 주교는 여러 언어에 능통한 언어 천재였다. 이렇게 뛰어난 선교사의 언어학적 노력이 결국 초기 한국학의 근간을 세운 셈"이라고 평가했다.
'하다'는 몬시뇰 리차드 러트 신부가 2008년 기증한 책 약 2천권에 끼어 보들리언 도서관에 들어왔다. 2011년 한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보들리안 도서관이 출간한 책 '한국의 보물'(Korean Treasures·민 청)에 포함돼 처음 소개됐으나 여전히 학계 연구나 대중 인지도는 미미하다.
주영한국문화원은 '하다'를 비롯해 영국 주요 기관이 소장한 한국 문화유산을 디지털 이미지로 정리해 오는 17일부터 열리는 전시 '염화미소:인공지능과 문화유산'에서 일반 공개한다.
선승혜 문화원장은 "단순한 한글 문법서를 넘어 '하다' 앞에 명사만 붙이면 수많은 일이 가능해지는 한국어의 구조와 한국인의 사고 구조를 간파한 책으로, 한국의 역동성이 '하다'라는 동사로 압축해 드러나고 있다"면서 한국 미학의 관점에서 '하다'를 조명하게 됐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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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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