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뻗어나간 한국 문화의 중심엔 한글이 있습니다. 한글로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글 중 하나가 바로 시조입니다.”
지난 5일, 서울 종로구민회관 창신아트홀에서 정용국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이 전국에서 온 219명의 초·중·고 학생에게 이렇게 말했다. ‘청소년들의 시조축제’라고도 불리는 제11회 중앙학생시조백일장의 본심과 제8회 중앙학생시조암송경연대회 예·본심 자리에서다.
올해 432명이 시조백일장 예선에 응모했고, 311명이 본심에 진출했다. 이중 본심에 참여한 사람은 219명으로 지난해보다 20여 명 늘었다. 지난해 8명이 참여했던 암송대회에는 12명이 참여했다. 백일장과 암송대회에 동시에 참가한 5명을 고려하면 이날 현장 참가자는 총 226명. 이중엔 제주·진도 등에서 비행기를 타고 온 학생도 있었다.
백일장을 시작하기 전, 이지엽 학생시조백일장 심사위원장이 심사 기준을 안내했다. 이 위원장은 “시조의 형식과 참신성을 보려한다”며 “당선과 상관없이 꿈을 가지고 정진하길 바란다”고 격려했다.
오전 11시 김영주 한국시조시인협회 사무총장이 시제(詩題)를 발표했다. 초등부는 ‘짝꿍’과 ‘내 동생’, 중등부는 ‘사춘기’와 ‘폭염’, 고등부는 ‘쓰레기’, ‘구름의 발’이었다. 백일장이 시작되자 참가자들은 연습 종이에 머릿속 구상을 정리하며 시조 짓기에 집중했다.
오후 2시부터 시작된 시조암송대회는 한국시조시인협회가 5월에 공개한 시조 50편 중 현장에서 학생이 뽑은 번호의 시조를 외우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참가자는 자신이 뽑은 두 개의 시조를 각각 암송했다.
본심에 오른 학생은 이 중 8명. 본심은 1대1 토너먼트 형식으로 진행됐다. 결승에선 자유로운 감정 표현이 돋보인 화성수기초 4학년 민경하 학생과 차분한 태도로 암송을 정확히 해낸 진주 주약초 3학년 김은수 학생이 맞붙었다. 초반부 민경하 학생이 의성어 하나를 잘못 말하면서 암송 정확도가 높았던 김은수 학생이 암송대회 대상을 거머쥐었다.
이어 앞서 진행된 시조백일장의 심사 결과가 발표됐다. 이지엽 심사위원장은 “초·중등부 작품의 기량이 많이 향상됐고, 고등부의 경우 ‘구름의 발’ 시제를 통해 시적 상상력을 활달하게 펼친 작품들이 주목됐다”고 총평을 전했다.
교육부장관상인 대상 시상을 한 김천홍 교육부 책임교육정책관은 “본 대회를 통해 (학생들은) 새로운 것과 전통적인 것을 융합하고, 다시 새로운 것을 창안해 내는 성장의 경험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현
상
중앙일보 논설주간은 “어떤 길을 선택하든, 창작을 위해 열과 성을 다한 오늘의 경험이 마음에 남아 여러분을 싹틔울 것”이라고 했다.
━
초등부 대상
김다은(서울선곡초5)
내 동생
피자처럼 동글동글 조그마한 동생얼굴
젤리같이 말캉말캉 내동생 빨간입술
모든 게 귀여운 내동생 하나뿐인 내동생
싸울 땐 머리에 불 놀 때는 입꼬리 씩
상황마다 각각다른 수십개의 마음들
내동생 마음을 조종하는 마음의 조종사
━
“일기 쓰듯이 취미로 쓴 시조
…
수상의 기쁜 마음도 적어둘 것”
서울 선곡초등학교 5학년 김다은(11)양은 지난해에도 중앙학생시조백일장에 참가했다. 대상 수상에 “우수상은 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대상일 줄은 몰랐다. 뿌듯하다”고 말했다.
김양은 시제가 공개되자마자 ‘내동생’을 골랐다. 대회에 응원 차 나온 4살 터울 여동생을 떠올리면서 쓸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다. 김양은 동생에 대해 “많이 싸우지만 잘 지내려고 노력한다”며 “아기 때의 동생과 지금의 동생을 함께 담고자 했다. ‘웃을 땐 꽃보다 방긋 웃는 웃음부자 내동생’이라는 표현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김양은 백일장이 끝나고 동생에게도 시조를 보여줬다.
힘든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의사가 꿈이라는 김양은 취미로 글을 쓴다. “일기처럼 시 혹은 시조로 오늘의 감정을 기록한다”며 “오늘의 기쁜 마음도 적어두고 싶다”고 말했다.
━
중등부 대상
이유담(안산해솔중2)
사춘기
나를 세운 시소는 삐딱하게 앉아있다
바람은 삐걱대는 소리만 요란할 뿐
풀 죽은 발소리조차 감추지는 못한다
물 만난 연어처럼 튀어오른 마음은
차디찬 플라스틱 지지대를 일으켜
감정의 무게중심을 한쪽으로 기울인다
쓰디쓴 감정조각 반대편에 올려놓고
위쪽으로 날릴까 내 마음을 내릴까
평형을 이룬다는 건 중심에 서 있는 것
━
“시조 한줄로 내 생각 표현
…
글 쓸 때마다 행복 경험”
안산 해솔중학교 2학년 이유담(14)양도 지난해와 2018년 시조백일장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2018년엔 가작을 수상했다. 이 양은 “대상 수상이 믿기지 않는다”며 “친구들이 글 쓰는 데 영감을 많이 줘서, 받은 상금으로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양은 ‘사춘기’라는 시제를 봤을 때 “내 얘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 골랐다”고 말했다. 특히 2연의 마지막 줄과 3연의 첫번째 줄을 쓰는 데에 공을 들였다. 이 양은 판타지 소설을 읽는 걸 좋아하지만 “짧은 한 줄에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할 수 있어, 쓰는 건 시가 좋다”고 말했다. 장래희망은 외과 의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알게 된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 등을 보며 꿈을 키웠다. 글을 쓸 때의 행복을 계속 경험하고 싶다는 이 양은 “내년에도 시조백일장에 참여하려 한다”고 전했다.
━
고등부 대상
최승혁(부천계남고1)
구름의 발
크나큰 도화지에 군청색 채워 넣고
한없이 깊은 파랑 눈 안에 담아낸다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단조로운 그 색채
온전한 파랑이라 커지는 외로움에
나 홀로 덩그러니 놓여진 이 공간 속
누군가 내 안쪽으로 다가오길 원했다
그사이 내 한 폭의 그림에 찾아온
발 이끌고 총총대며 다가온 뭉게구름
그제야 내 그림 또한 넓은 하늘 되었다
━
“등단 꿈꾸며 글 쓰던 날들
…
꿈 향해 나아갈 용기 생겨”
최승혁(17)군의 시조에 심사위원들은 “바로 등단해도 될 정도”라고 감탄했다. 등단을 꿈꿔온 그에겐 큰 응원의 말이었다. “좋은 심사평을 듣기 전까진 ‘이 길이 맞나
?
’ 하는 불안함이 있었다. 이번 작품을 낼 때도 마지막 부분이 성에 차지 않아서 보완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데 이렇게 대상을 받으면서, 계속 꿈을 향해 나아가도 되겠다는 용기가 생겼다”고 기뻐했다.
외로움과 위로의 정서를 담은 작품을 쓴 이유로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내 성격이 드러난 것 같다. 은사님인 중학교 사서 선생님께 받았던 위로도 큰 힘이 됐다. 평소 소설, 수필, 시, 시조를 즐겨 쓰는데 은사님께 어떠냐고 많이 여쭤보고 의지한다”고 밝혔다.
시조의 매력에 대해선 “내 생각대로 글자 수가 딱 맞아 떨어질 때면 희열을 느낀다”고 전했다.
━
암송경연 대상
김은수(진주주약초3)
작년 수상자 친구 통해 도전
…
“한달 반 매일 녹음하며 연습”
김은수(10)양은 “한 달 반 정도를 매일 녹음해가며 연습했다. 앞에 나갔을 때 떨리긴 했지만 주변 응원 소리에 힘이 많이 났다”고 말했다. 그는 암송대회로 처음 시조를 접했다. 지난해 최우수상을 받은 친구(김지명 양)를 통해 이 대회를 알게 됐고,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또 “외우면서 재미있는 시조가 많다고 느꼈다.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점점 생긴다”고 덧붙였다.
━
우수지도자상
김경구
학생 76명 예선 응모 도와줘
…
“평소 아이들 시조 눈 여겨 봐”
2006년부터 20년째 충주의 초등학교에서 방과후 국어논술 지도교사로 일하고 있는 김경구(59)씨는 올해 76명의 학생이 예선 응모하도록 도왔다. 이중 본심에 오른 학생도 53명이나 된다. 김씨는 “학교와 도서관 등에서 만난 학생들이 쓴 시조를 눈 여겨 봤다. 이중 시조백일장에 어울리겠다고 생각한 작품을 모아, 학생들의 허락을 받고 예선에 출품했다”고 말했다.
━
심사평
감수성 높고 은유 뛰어나, 사실상 모두가 대상 ◆초등부= 초등부 백일장 원고를 정독하며 10여편을 선정했고 심사위원끼리 의견을 조율한 결과 무리 없이 서울 선곡초 5학년 김다은 학생을 대상으로 선정하는 데 합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백일장에 참가한 학생 모두가 대상이라는 말을 전하며, 모든 학생들에게 축하의 마음을 보낸다.
초등부 심사위원 김선호·김종빈
◆중등부= 대상에 오른 이유담은 ‘시소’라는 운동기구를 통해 내면의 상상력을 길어 올리는데 성공했다고 본다. 최우수상에 오른 정혜민은 ‘못’이라는 날카로운 사물을 통하여 어머니의 사랑을 이끌어냈는데 용서와 관용을 잘 버무려냈다. 우수상을 차지한 김민수는 평시조임에도 봄과 벚꽃을 통해 사춘기를 잘 극복해냈으며 우수상의 이로율은 사춘기를 ‘독립과 태극기’를 통하여 통쾌하게 극복하고 있어서 시조의 맛을 더했다.
중등부 심사위원 조영자·김강호
◆고등부=대상으로 올려진 최승혁의 작품은 ‘구름의 발’이라는 풀어내기 어려운 것이었음에도 ‘하늘과 구름’이라는 자연현상을 인간의 심적 외로움으로 표현해 낸 감수성이 높은 작품이었다. 구름이 하늘의 외로움을 달래주기 위해 찾아온다는 상상은 높이 살 만한 은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