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장 변경이요? 그건 폐업이나 폭행당했을 때만 가능해요”라는 출입국사무소 담당자의 사무적인 말에 A씨는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시흥의 한 자동차 부품 회사에서 일하던 A씨는 의사의 진단서를 들고 출입국사무소를 찾았다. 3년 동안 허리를 숙이는 작업을 반복해야 했던 A씨는 허리에 큰 무리가 가서 더 이상 같은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의사는 “추간판전위증이어서 육체노동은 병을 악화시킨다”고 명시했지만, 출입국 직원은 단호했다. “그건 개인 사유입니다.” 그러니까, 허리가 아파도 고용주의 동의 없이는 움직일 수 없다는 뜻이다. 아니 고용주의 동의가 있고 허리에 무리가 가지 않는 일을 할 수 있는 다른 사업장에 새로 계약을 했더라도 출입국사무소는 사업장 변경을 엄격히 제한한다. 왜냐하면 E-7 비자를 받은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이직 허용 조항 지나치게 엄격
추락 위험 고소 작업장 못 떠나
노동권 넘어 인간 존엄성 위협
공단지역이나 농어촌에서 흔히 보는 이주노동자는 대부분 E-9 비자를 받아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E-9 비자는 말 그대로 비전문취업 비자인 반면, 한국에는 이들 외에도 E-7 비자로 일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이 있다. E-7 비자는 ‘특정활동’에 종사하는 외국인에게 발급되는 비자인데 E-7 비자는 국내에서 취업활동을 할 수 있는 비자 중 가장 다양한 분야의 활동을 할 수 있다. 좀 더 세부적으로는 E-7-1(전문인력), E-7-2(준전문인력), E-7-3(일반기능인력), E-7-4(숙련기능인력)등으로 분류된다. 관련 통계를 보면 일반기능인력과 숙련기능인력이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이는 제조업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이 늘어가는 추세를 반영한다. 그러나 고용노동부의 관리와 지원을 받는 E-9 이주노동자들과 달리, E-7 이주노동자들은 노동자에 대한 지원보다는 출입국관리에 중점을 두는 법무부의 관리를 받다 보니 더욱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다.
베트남에서 전기 엔지니어로 5년을 일했던 B씨는 한국에서 ‘전기 설계와 감독’을 하겠다며 E-7-1 비자로 강원도 원주에 왔다. 그러나 정작 맡겨진 일은 전기와 아무 상관 없는 청소, 배관 설치, 농장 잡일. 하루는 지붕에서 방수 작업, 하루는 콘크리트 들기. 근로계약서에는 전기기술자, 현실은 단순 육체노동이었다.
이주노동자 B씨는 이제 묻는다. “나는 기술자로 온 건가, 일용직으로 온 건가?”
조선업에서 일하는 C씨는 한국에서 배운 기술을 조선소에서 써보고 싶었다. 그래서 거제에서 E-7-1 비자로 도장 작업을 한다. 그러나 하루 9시간, 고소(高所) 도장 작업을 하며 안전벨트 없이 일한다. 도장 기계는 계속 움직여야 해서 벨트를 설치할 수 없단다. “안전벨트를 한 적이 없습니다”는 그의 말은, 한국 노동 현실의 맨살을 드러낸다.
“위험해서 못하겠습니다”는 말은 여기선 사치다. 근무 시작 2개월 만에 이직을 요청했지만 회사는 이직동의서를 내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7m 높이의 발판 위에서, 묵묵히 페인트를 뿌린다. 실수 한 번이면 추락. 그래도 그는 한국 땅에서 버티고 있다.
이들에게 이직은 ‘권리’가 아니다. 허락받아야 하는 ‘특혜’다. 우리는 지금 어떤 나라에 살고 있는가. 이주민이 아파도, 억울해도, 지쳐도, 위험해도 비자를 인질로 잡아 근무처를 변경하지 못하는 이 땅. 오늘도 이름 없는 이주노동자들이 근무처 변경의 벽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의 호소를 해야 하는 것이 E-7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이다. 한국 사회는 이들의 노동은 반기지만, 이동의 자유는 묶어둔다.
근무처 변경 사유가 휴·폐업, 경영악화, 임금체불, 폭행 등에 한정된다는 규정은 “일하다 죽기 전까지는 참아라”는 말과 다르지 않고 또한 자의적으로 적용될 위험이 크다. 계약된 업무와 다른 일을 시켜도, 안전장비 없이 위험 업무를 시켜도, 아파도, 사직을 통보받아도 고용주의 동의와 출입국사무소의 허락이 없으면 이직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한국은 고령화 사회다. 숙련된 기술 인력 유입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여기서 일하려면 감수해야지”라는 말이 통용된다. 고용계약 위반에도, 생명의 위험에도, 이직할 수 없는 현실. 이게 정말 우리가 바라는 기술 인재 유치 정책인가?
사업장 변경은 단순한 절차 문제가 아니다. 생존권, 노동권,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문제다. 우리는 이주노동자에게 “합법적으로만 일하라” 말하지만, 정작 합법적 절차 안에서 생존할 수 없게 만든다.
이제라도 정부는 사업장 변경 사유를 현실적으로 넓혀야 한다. 건강 문제, 안전 위험, 계약 위반, 업무 불일치 모두 분명한 이유가 된다. 그리고 노동자의 자율적 권한이 중심이 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허가 없이는 떠날 수 없다”는 구조는 현대판 노예계약과 무엇이 다른가.
내외국인을 불문하고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하고, 스스로 선택하며, 존중받는 사회, 나는 한국이 그런 사회를 향해 나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