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서울반도체고등학교는 원래 휘경공고였다. 이명박 대통령 당시 마이스터고교였을 때는 전교생이 2500명에 이를 정도로 큰 학교였으나 현재 학생 수는 80명에 불과하다. 폐교 위기까지 몰렸던 이 학교가 반도체고등학교로 변신, 내년부터 신입생 64명을 뽑는다.
지우정 신임 교장은 삼성전자 임원 출신이다. 인도와 이집트에서 현지공장을 운영해 본 경험도 있다. 하지만 지 교장의 앞길은 첩첩산중이다. 정부가 예산을 지원해 주지만, 인건비를 빼면 간단한 중고 반도체 장비조차 구입할 수 없다. 반도체를 가르칠 교원을 확보하는 것은 더 힘든 과제다. 시간당 최고 5만원의 강사 자리에 능력 있고 경험 많은 현장 베테랑이 지원할지 미지수다. 설사 의욕 있는 강사가 온다 할지라도 교사로 계속 남을 수 없다. 현행 교육부 규정에 따르면 정식교사는 반드시 교사 자격증을 갖고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반도체를 전공하고 교사 자격증을 딴 적임자를 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 학교는 전원 기숙사 수용을 입학 혜택으로 내걸었다. 그런데 각종 인허가 조건을 맞추려면 1000평짜리 기숙사를 짓는 데 4년이나 걸린다고 한다.
2031년까지 인력 5만 명 부족할 듯
TSMC는 고교·대학 현장교육 주도
나눠먹기 지원으론 대만 추월 못해
1980년대부터 반도체는 한국 경제의 주축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반도체고등학교는 현재 6개로, 대부분 갓 개교한 걸음마 수준이다. TSMC를 앞세워 반도체 최강국가로 떠오른 대만은 반도체 인력의 양과 질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대만은 2019년 설립한 대만반도체연구기관(TSRI) 주도로 반도체 인력을 양성하고 있다. TSRI는 반도체 장비를 24시간 개방해 낮에는 연구자들이, 밤에는 반도체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실험하고 있다. 필요한 첨단 고가 장비는 대부분 TSMC에서 제공한다. TSMC는 지난해 40억 대만달러(약 1700억원)를 국립대만대·칭화대·양밍교통대·타이난성공대와 일부 명문 고교에 기부했다.
대만은 또 2022년 TSMC 주도로 건국고 등 10개 명문고에서 6주간 반도체 원리와 제조 공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대만은 매년 석·박사를 포함해 전문인력 1만 명을 배출해 한국을 압도하고 있다. 그 결과 TSMC의 엔지니어는 10만 명을 넘는다. 삼성전자는 1만5000명에 불과하다.
한국 반도체업계는 앞으로 더 심각한 인력난을 겪을 전망이다. 감사원은 최근 ‘4차 산업혁명 대응 점검 감사보고서’에서 2031년까지 반도체 인력 5만 명이 부족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정부의 인재 양성은 한심한 수준이다. 과학기술부는 2031년까지 반도체 설계(팹리스) 인재 850명을 양성할 계획이었지만 예산이 없어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정부가 대학 반도체 분야에 실제 지원하는 연구비는 연간 1000억원 수준에 불과하다. 반도체를 가르칠 교수들도 부족하다. 서울대 공대 교수 330여 명 중 반도체 전공 교수는 15명밖에 안 된다. 반도체를 가르치는 대학의 교육과 시설 수준도 엉망이다. 교육부에서 43개 대학을 조사한 결과 업계에서 요구하는 교과목을 개설한 비율이 절반 정도밖에 안 됐다. 반도체 교육에 필요한 필수장비를 기준 이상 보유한 대학은 단 두 곳에 불과했다. 경쟁력을 갖춘 대학에 지원을 몰아줘야 하지만 지역 정치인의 압력에 여기저기 분산된 결과다.
한국 반도체는 글로벌 하청업체로 전락할 위기인데 우리 정부를 보면 절박함은 물론 최소한의 의지도 보이지 않는다. 황철성 서울대 석좌교수는 지난 3일 대한민국최고과학기술인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반도체 관련 SCI 논문 750편을 발표하고 석·박사 165명을 배출한 공로다. 황 교수는 한국 반도체 인력 양성에 대해 뼈아픈 일침을 놨다.
“한국 과학기술 연구비는 관료가 쥐고 있고, 관료는 정치인의 눈치를 보고, 정치인은 표를 의식합니다. 나눠먹기식으로 예산을 분산하면 한국 반도체 교육의 질은 나아질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