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이 없고 돈도 부족한 우리에게 전기가 필요합니다.”(이승만 대통령)
“우라늄 1g으로 석탄 3t의 에너지를 낼 수 있습니다. 석탄이 땅에서 캐는 에너지라면, 원자력은 사람의 머리에서 캐는 에너지 입니다. 원자력을 개발해야 합니다.”(워커 시슬러)
“무엇부터 해야 합니까.”(이 대통령)
“젊은 기술 인재를 키워야 합니다.”(시슬러)
“원자력 발전은 언제 쯤이나 가능할까요?”(이 대통령)
“지금 인재에 투자하면 20년 후에는 이뤄질겁니다.”(시슬러)
1956년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시슬러 미국 대통령 에너지 고문이 만나 이런 대화를 나눴다. 2차대전 후 유럽 에너지 복구에 참여했던 시슬러는 서울 당인리 발전소를 지을 때 차관을 주선하는 등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랬던 그에게 이승만 대통령은 전력 확보 방안을 물었고 시슬러는 원자력을 추천했다. 이 날의 대화는 한국을 오늘날 원전 수출국으로 만드는 첫걸음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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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 인재 238명 해외 유학
이보다 한 해 앞선 55년, 젊은 과학기술자 10여 명이 자발적으로 원자력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한 명이었던 이창건(96) 박사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미군들과 같이 원자력을 공부하다 제대한 공군 장교 출신 선배들이 있었어요. 이 분들이 교재를 가져오고 전기공학ㆍ물리학 같은 관련 학과 후배들을 모아 문교부(현 교육부) 창고에서 공부를 시작했지. 교재가 한 권 밖에 없어서 내가 타이프를 쳐서 10여 권을 다 만들었어.“
그러던 차에 이승만 대통령과 시슬러가 만났다. 56년 81세였던 이 대통령은 ”지금 인력을 키우면 20년 뒤에나 원자력 발전이 될 것“이라는 말에도 주저없이 그 길을 택했다. 우선 시슬러의 권유 대로 인재를 키우려 238명을 유학보냈다. 이창건 박사를 비롯해 함께 원자력을 공부하던 그룹도 거기에 들었다. 1인당 유학비용은 6000달러. 당시 한국 1인당 GDP(80달러)의 75배에 이르는 거액이었다.
또 교육부에 원자력과를 만들고 원자력법을 제정하는 등 행정적 기틀을 마련했다. 원자력연구소도 세웠다. 이창건 박사는 ”원자력법을 만들기 위해 국회의원 등을 설득하는 과정에 돈이 많이 들었다“며 ”초대 원자력과장이던 고(故) 윤세원 박사가 개인 돈을 들이다 못해 빚을 지고 집까지 처분했다“고 말했다.
대학에 원자력 관련 학과도 들어섰다. 국가 주도 사업임에도 사립인 한양대(58년ㆍ당시는 한양공과대학)가 국립 서울대(59년)보다 한 해 앞서 학과를 세웠다. 한양대 원자력공학과 김용균 학과장은 ”이승만 대통령이 개인적 친분이 있던 고(故) 김연준 한양대 설립자에게 권유해 학과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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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예산 30% 규모 고리 1호기 건설
원전 수출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론을 공부한 인재만드로는 부족하다. 무엇보다 원전을 직접 건설하고 운영해 본 노하우가 필요하다. 당연히 국내 원전 건설이 필수다. 그건 박정희 대통령 때 이뤄졌다. 고리 1호기가 71년 착공해 78년 상업 운전을 시작했다. 78년은 시슬러가 “20년 뒤에 원자력 발전을 할 수 있다”고 한 지 22년 후였다.
고리 1호기 사업비는 약 1560억원이었다. 착공연도인 71년 국가 예산(5242억원)의 30%다. 산업 발전을 위해 전력이 필요했던 박정희 정부는 이런 어마어마한 사업을 밀어붙였다. 일부 국가 예산이 들이고, 대부분은 미국과 영국에서 차관을 얻어 해결했다.
고리 1호기 부지 선정을 담당했던 이창건 박사는 뜻하지 않은 고초를 겪었다. 후보지를 찾아 동해안을 누비다 간첩으로 오인 받아 해병대에 붙잡혔다. 이 박사의 가방에서 나온 망원경ㆍ사진기ㆍ줄자 등이 의혹을 더했다. 게다가 이 박사는 고향인 평안도 사투리까지 썼다. 원전 후보지를 답사한다는 출장명령서도 별무신통이었다. ”북괴가 그런 건 얼마든지 위조할 수 있다“며 얼굴에 주먹이 날아왔다. 나중에 오해는 풀렸지만 구타 당한 후유증으로 숨쉬기가 여의치 않게 됐다. 지금도 이 박사는 잠잘 때 호흡을 돕는 기구를 입에 끼어야 한다.
처음 고리 1호기 사업을 추진할 때 논란이 벌어졌다. 어떤 원자로를 택할 것인가를 놓고서였다. 영국은 ‘가스냉각로’를 제시했고, 미국은 요즘 쓰는 ‘가압경수로’를 내밀었다. 당시 영국 측에는 사울 아이젠버그라는 유대계 인물이 있었다. 그는 60년대 초반 국내 발전소와 시멘트 공장 건설에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 한국을 도왔다. 당연히 한국 정치계에 미치는 영향력도 막강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면밀한 검토를 거쳐 가압경수로를 택해야 한다고 정부에 보고했고, 정부도 이를 받아들였다.
아이젠버그가 노발대발했다는 후문이 들렸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 정부는 기술적 문제가 있다며 가스냉각로 수출을 금지시켰다. 가압경수로 선택은 과학기술과 합리가 정치 논리를 누른 사례로 기록됐다.
과학과 합리가 통한 사례는 또 있다. 80년대 후반 평민당은 원전에 반대했다. 당시 동력자원위원회 소속이었던 고(故) 조희철 의원이 특히 완강했다. 그러나 미국의 원전 업체를 둘러보고 스스로 공부하면서 원전이 필요하다는 쪽으로 입장을 바꿨다. 김대중 총재를 설득하기도 했다. 결국 DJ는 89년 목포대학 강연에서 ”원자력 에너지의 개발은 불가피하다“고 이른바 ‘목포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국내에 원전을 건설했어도 수출은 아직 먼 길이었다. 원전 설계 같은 핵심 기술을 확보해야 했다. 이는 80년대에 이뤄졌다. 원전을 계속 지으면서 건설 외국업체에 기술 이전을 요구했다. 80년대 후반 우리 과학기술자들이 독일에서 설계 기술을 익힐 때는 연구소 담을 넘어 퇴근하다 안전요원에게 붙잡히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빨리 기술을 익힐 욕심(?)에 야근을 하다보니 문이 잠겨 담을 넘었던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90년대 OPR1000, 2000년대 들어 APR1400등의 한국 독자 모델 원자로를 개발했다. APR1400은 2009년 UAE에 수출한, 바로 그 원자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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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쩌민 만나 중국에 원전 수출 추진
한국은 원전 ORP1000을 개발한 뒤부터 수출의 문을 두드렸다. 첫 대상은 중국이었다. 93년 취임한 이종훈 한전 사장이 원전 2기 건설계획을 갖고 있던 광둥(廣東)원전 그룹을 접촉했다. 그러던 차에 장쩌민(江澤民) 주석이 방한해 제주 신라호텔에서 기업인들과 만찬을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사장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었던 고(故) 김상하 삼양그룹 회장에게 부탁해 장 주석을 면담했다. 다음은 이 사장이 전한 경험담이다.
”장 주석이 ‘나도 중국 최초 원자력 발전소를 지을 때 프로젝트 매니저를 했다’며 반겼다. 중국 측과 계속 얘기가 오갔다. 97년 장 주석을 만났을 때는 ‘다음에 원자력 발전소를 지을 때 한국을 꼭 입찰에 초청하겠다’고 했다. 98년 4월 28일엔 차기 중국 국가주석으로 알려진 후진타오(胡錦濤)가 방한해 한전 사장을 만나려 했다. 하필 그 날, 나는 새 정부가 들어서며 퇴임했다. 후임자도 없어 후진타오와 만남은 불발됐다. 그 뒤 중국 수출 얘기가 끊겼다.“
그러고 11년이 지난 2009년 UAE에 첫 원전 수출이 이뤄졌다. 직후 이창건 박사는 국립묘지를 찾았다. 이승만 대통령 묘역 앞에 원전 수출 소식이 실린 신문을 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하에서도 기뻐하십시오. 우리들을 잘 훈련시켜 UAE에 원전을 수출하게 됐습니다. 20년 앞을 내다보고 하신 결과입니다.“
한국이 원전 기술 강국이 된 것은 국가 지도자들이 먼 미래를 보고 투자하고, 과학기술자들은 선진국을 따라잡으려 밤낮으로 연구개발에 매달린 결과였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5년간 탈원전이라는 암흑기를 겪어야 했다. 그러고도 마침내 체코 수출에 성공했다. 한국원자력연구소 원자로개발그룹장과 부소장 등을 지내며 기술 자립을 이끈 김시환(79) 박사는 ”탈원전 5년간 중국이 우리를 바짝 추격했다“며 ”원전 수출이 많이 이뤄져 경제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새 정부가 원전 기술을 더 발전시킬 수 있는 정책을 펼쳤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