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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신라에서도 쓴 놋쇠그릇 '유기', 현대에도 '안성맞춤'

중앙일보

2025.07.0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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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하거나 생각한 대로 잘 만들어진 물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안성맞춤'이란 단어는 경기도 안성에 유기를 주문해서 만든 것처럼 잘 들어맞는다는 데서 유래했죠. 그렇다면 유기는 무엇이고, 안성의 유기는 왜 유명할까요. 김민영·이시온 학생기자가 경기도 안성시 대덕면에 있는 안성맞춤박물관을 찾아 김봉수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그 이유를 알아봤습니다.

김민영(왼쪽)·이시온 학생기자가 경기도 안성맞춤박물관을 찾아 우리 민족과 수천 년을 함께 해온 유기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알아봤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금속 그릇은 보통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졌죠. 스테인리스 그릇은 1970년대부터 쌀을 덜 먹자는 절미운동의 일환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기존에 쌀밥을 고봉으로 담아 먹던 식문화를 탈피하기 위해 지름 11.5cm, 높이 7.5cm의 스테인리스 밥그릇이 정부 주도로 보급된 거죠.

스테인리스 밥그릇이 대중화되기 전까지 우리 민족에게 익숙한 금속제 그릇은 유기(鍮器)였습니다. 유기는 구리를 기본으로 주석·아연·니켈 등 비철금속(非鐵金屬)을 섞은 합금으로 만든 여러 기물을 뜻하죠. 원료의 배합 비율에 따라 빛깔과 성질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가장 잘 알려진 유기는 구리와 주석을 배합해 만든 놋쇠로 만들었어요. 우리나라 유기의 역사는 청동기시대부터 시작됐고, 신라에는 유기를 만드는 국가 전문기관이 있었을 만큼 그 역사가 길죠. 안성맞춤박물관의 유기전시실에서는 유기의 정의와 역사, 다양한 쓰임새를 살펴볼 수 있어요.
김봉수 해설사(맨 왼쪽)가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유기의 개념과 '안성맞춤'이란 표현의 어원을 알려줬다.

유기는 제작 기법과 완성품의 성질에 따라 배합비율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구리와 주석을 섞어 1200~1300°C의 높은 온도로 녹인 후, 식어서 굳기 전 망치로 두드려서 만드는 방짜유기 기법은 구리 78%에 주석을 22% 비율로 섞죠. 메질이라 하는 두드리는 과정 때문에 동일한 규격으로 대량 생산이 불가능하지만, 두들겨 만들기 때문에 재료의 밀도가 높아지면서 휘거나 잘 깨지지 않죠.

시온 학생기자가 "구리와 주석 합금 비율이 일정한 이유가 궁금해요"라고 질문했어요. "방짜유기는 메질을 하면서 만들기에 조금이라도 합금비율이 달라지면 두드리는 과정에서 깨질 가능성이 높아서 그렇습니다." 소중 학생기자단 앞에는 방짜유기 기법으로 만든 불교 사찰에서 쓰는 좌종(坐鐘)이 있었는데요. 울퉁불퉁한 겉면에서 메질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죠.
 메질을 거치는 방짜유기 기법으로 만든 좌종. 울퉁불퉁한 표면에서 메질의 흔적이 보인다.
이시온 학생기자가 방짜유기·주물유기 등 유기 제작 방법의 특성을 살폈다.

주물유기 기법은 원하는 모양의 틀을 만들어서 그 틀에 녹은 쇳물을 붓고 굳혀서 만드는 겁니다. 틀을 사용하기에 방짜유기와 달리 동일한 규격으로 대량 생산이 가능하며, 원하는 모양이 만들어질 때까지 쉼 없이 메질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죠. 하지만 틀 안에 쇳물을 붓기 때문에 얇게 만들기 어려우며, 방짜유기에 비해 강도가 약해서 떨어뜨리면 깨지는 경우가 많아요.

강한 메질을 견뎌야 해서 구리와 주석의 섞는 비율이 정해진 방짜유기 기법과 달리 주물유기 기법은 구리에 아연·니켈 등 다른 비철금속을 합금하기도 해요. 예를 들어 구리와 아연을 합금해 만들면 황동유기라 하는데 노르스름한 빛깔에 은은한 광택이 나고, 구리에 니켈을 합금하면 백동유기라 하며 흰빛을 띠죠. 전시실에서는 백동으로 만든 촛대를 살펴볼 수 있었어요. 백동은 다른 유기 재료들보다 훨씬 고가였기에 제례용품이나 고급 공예용으로 주로 사용했답니다.
주물유기 기법으로 만든 물을 담는 그릇 동이. 방짜유기로 만든 좌종에 비해 표면이 매끈하다.

유기는 색상이 금과 비슷하고 은은한 광택이 나서 조선시대 이전에는 왕실 및 지배층을 중심으로 사찰·향교 등에서 종교·제례용품으로 사용했어요.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일반 대중에게도 보급됐죠. 제사상에 올리는 제물을 담는 제기와 향로 등 절에서 사용하는 기물인 불구는 물론, 요강·화로·등잔·거울·다리미 생활용품도 유기로 만들었어요. 배합 비율에 따라 단단하고 견고한 물성을 만들 수 있었고, 음식의 원래 온도를 유지하는 보냉·보온 기능도 뛰어나 식기로도 많이 쓰였죠.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이 당시의 문물제도 및 세시에 관해 기록한 풍속지인 『경도잡지』에 "우리나라 풍속에 놋그릇을 소중히 여겨 사람마다 반드시 놋붙이로 밥그릇·국그릇·나물접시·구이접시 등 반상기를 갖추어 놓으며 심지어는 대야와 요강까지 놋붙이로 만든다"라는 구절이 등장하기도 하죠. 전시실을 둘러보던 민영·시온 학생기자는 "유기 하면 음식을 담는 그릇만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양한 종류가 있는지 몰랐어요"라고 감탄했죠.

쓰임새가 다양한 만큼 유기는 전국 각지에서 제작됐는데요. 그중에서도 안성유기의 명성은 조선시대에도 자자했어요. 1744년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혼례식을 기록한 『가례도감의궤』 및 순원왕후의 『국장도감의궤』에 따르면 조선 후기에는 국가 행사가 있을 때 안성의 유기장들을 징발하여 유기를 제작하거나, 안성에서 유기를 구입해 사용했죠.
격식을 갖춰 밥상을 차리도록 만든 한 벌의 그릇인 유기 반상기.
김민영 학생기자가 유기로 만든 다양한 기물을 살폈다.

"조선시대 유기는 장에 내다 팔기 위해 대량으로 만드는 '장내기' 유기와 양반가 등 소비자가 요구한 데로 만들어주는 '맞춤' 유기 두 종류가 있었어요. 안성에는 조선 3대 시장인 안성시장이 열려 유기의 판로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으며, 한양과 지리적으로 가까워 한양에 있는 양반가에서 개인 맞춤으로 그릇을 주문하곤 했죠. 안성에는 광택이 선명하고 마감이 깔끔한 유기를 만드는 장인들이 많아 주문한 사람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다고 하여 '안성맞춤'이라는 말까지 나오게 됐는데요. 지금은 그 의미가 확장돼 유기뿐만 아니라 어떤 물건이나 상황이 딱 맞을 때도 안성맞춤이란 말을 쓰죠."

김 해설사의 설명을 듣던 민영 학생기자가 "어머니께 여쭤보니 유기는 변색이 잘 돼 부지런히 잘 관리해야 오래 쓸 수 있는 그릇이라고 하시는데요. 유기를 잘 관리하는 방법이 있나요"라고 궁금해했어요. 유기가 변색하는 이유는 주재료가 구리이기 때문이에요. 구리는 건조한 공기에서는 거의 산화되지 않지만, 습한 공기에서는 푸르게 녹이 슬죠. 유기 표면에 물기가 남아있으면 어둡게 변색하곤 하기에, 사용 후에는 최대한 빨리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완전히 제거하고 비닐봉지 등으로 공기가 안 통하게 밀폐해 보관하는 게 제일 좋아요.

유기로 만든 악기는 농악기인 꽹과리·징 등 타악기가 많다. 사진은 운라(雲鑼).
그렇다면 유기가 이미 변색됐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변색한 유기는 주방용 수세미로 잘 닦으면 원형으로 대부분 돌아와요. 그릇이 오래돼 변색이 심한 경우에는 철수세미로 변색한 부분을 씻으면 됩니다."

이처럼 수천 년간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았던 유기는 일제강점기 물자 징발 및 스테인리스 등 대체재의 부상을 거치며 유기를 만드는 공방들이 많이 사라졌고, 유기 자체도 한정식집 같은 일부 식당, 제례·공예품점 등에서나 볼 수 있는데요. 정부에서는 1983년부터 놋쇠로 각종 기물을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인 유기장(鍮器匠)을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어요. 안성에서는 김수영 유기장이 작고한 부친 고(故) 김근수 유기장의 뒤를 이어 2008년 8월 국가무형유산 유기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됐죠.

최근 유기는 전통에 머무는 기술이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 변신 중입니다. 뜨거운 음식의 뜨거움과 차가운 음식의 차가움을 잘 유지해 준다는 장점을 이용해 유기로 텀블러를 만들기도 하고, 황금과 같이 빛나는 아름다움을 살려 파스타볼·냅킨링·포크·나이프 서양식 식기 등을 만들기도 하죠.
유기는 구리를 주재료로 여러 비철금속을 더한 합금으로 만든다. 사진은 구리와 니켈을 섞은 백동으로 만든 촛대.

우리 민족은 다양한 생활용품을 유기로 만들어 사용했다. 사진은 침을 뱉는 그릇인 타구(唾具).
또한 유기의 주재료인 구리는 살균 효과가 있어요. 2008년 경기도보건환경연구원은 구리의 이온이 장염을 유발하는 비브리오균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를, 2019년 가톨릭대 의정부 성모병원 연구팀은 구리가 유해세균을 살균하는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죠. 이를 응용해 교실 문손잡이, 버스 손잡이 등을 유기와 같은 합금으로 만들기도 해요. 구리 자체는 성질이 무르고 쉽게 산화되지만, 유기처럼 합금하면 단단해지기 때문이죠. 우리 민족의 일상생활에 수천 년 동안 자리 잡은 유기에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가 숨어있다는 게 놀랍지 않나요.

동행취재= 김민영(충북 충북여중 1)· 이시온(경기도 홈스쿨링 6) 학생기자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유기 하면 놋쇠 밥그릇이 떠오르는데 안성맞춤박물관엔 구리 합금으로 만든 여러 종류의 물건들이 있어요.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솥, 높낮이 조절이 되는 촛대, 다양한 모양의 자물쇠, 화병, 재떨이와 같은 생활용품이 많고 기념주화도 봤죠. 그리고 스님들이 명상할 때에 앉아서 치는 좌종, 제사를 지낼 때 쓰는 술잔과 술그릇도 보았습니다. 유기로 여러 악기도 만드는데 작은 징들을 모아 놓은 운라, 심벌즈와 비슷한 모양의 바라, 요즘에도 볼 수 있는 꽹과리가 전시되어 있어요. 저는 운라가 인상적이었는데 작은 징들의 음의 높낮이가 각각 다르다고 해요. 같은 크기의 징인데 어떻게 소리가 다를까 궁금했는데 징마다 두께가 달라서 다른 높낮이의 소리가 난대요. 유기를 만드는 과정을 작은 모형으로 만들어놓은 전시실에선 구리와 주석을 배합한 쇳덩이를 두드려가며 형태를 만드는 방짜유기 기법과 쇳물을 틀에 부어서 만드는 주물유기 기법을 봤죠. 놋쇠를 두드려가며 만들면 튼튼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고, 쇳물을 틀에 부어서 만들면 같은 모양과 크기로 많이 만들 수 있지만 잘 깨지고 얇게 만들지 못한다고 합니다.

김민영(충북 충북여중 1) 학생기자

안성맞춤박물관에서 유기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알아봤어요. 유기란 구리 합금으로 만든 여러 기물을 말해요. 놋그릇뿐만 아니라 구리 합금으로 만든 모든 것을 유기라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김봉수 해설사님께서 처음부터 자세히 설명해 주셔서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옛날에는 어떤 식으로 유기가 사용되었는지, 유기를 만드는 과정은 어떠한지 등 여러 가지를 이해하게 쉽게 알려주셨죠.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놋쇠 외에도 백동·황동으로도 유기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수천 년 동안 유기그릇이 발전해 왔다는 것도 정말 흥미로웠어요. 우리 조상님들이 거듭된 실패를 통해 방짜유기에 적합한 구리와 주석의 비율을 발견하는 등 여러모로 발전해 온 것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졌어요. 앞으로 유기를 볼 때마다 이번 취재가 생각이 날 것 같아요.

이시온(경기도 홈스쿨링 6) 학생기자



성선해([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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