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마(魔)의 벽’이 깨졌다. 지난 6일 미국 유진에서 열린 다아어몬드리그 여자 5000m에서 케냐의 육상 스타 비어트리스 체벳(25)이 14분 벽을 깨고 13분58초06으로 우승했다. 그는 사상 최초로 5000m를 14분 안에 주파한 여성이 됐다. 100m 랩타임이 16.8초 이내여야 가능한 기록이다. 체벳은 3000m를 8분22초96으로 통과해 14분 미만 달성에 1초 늦었지만, 마지막 200m를 남기고 스퍼트를 해 2초 빨리 들어왔다. 그는 지난해 파리 올림픽에서 1만m 세계 신기록(28분54초14)을 세우기도 했다.
이날 케냐의 또 다른 육상 스타 페이스 키프예곤(31)도 여자 1500m 세계신기록(3분48초68)을 작성했다. 그는 지난달 27일 오직 마의 벽을 깨기 위한 이벤트의 주인공이었다. 여자 ‘1마일(1609m) 4분’ 벽. 13명의 페이스메이커를 비롯해 공기 저항을 줄이기 위한 첨단 기술과 장비가 총동원됐다. 앞쪽 공기는 분리하고 후방에는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켜 저항력을 줄이는 수트, 습기 관리에 최적화된 브라, 타이타늄 스파이크를 6개 장착한 러닝화 등이다. 그러나 벽을 깨진 못했다. 4분06초42. 그래도 비공식 세계 기록이다.
육상에서 마의 벽은 선수들이 넘기 힘든 심리적 장벽이자 기록의 한계를 뜻한다. ‘1마일 4분’, ‘마라톤 2시간’, ‘100m 10초’가 대표적이다. 이는 단순히 기록 단축의 어려움을 넘어 선수들의 정신적인 한계를 시험하는 심리적 장벽을 의미한다.
시작은 남자 육상 1마일 4분 벽이었다. 영국 아마추어체육인협회(AAA) 소속의 로저 배니스터가 등장하기 전까지 이는 불가능의 영역으로 쳤다. 배니스터는 1954년 옥스퍼드대 트랙 경기장 1마일을 3분59초4로 달려 역사상 최초로 ‘마의 4분’을 깼다. 기록 달성 후 그는 “내가 뛰어넘은 건 정신력의 한계다. 4분 기록을 깨는 것은 에베레스트 정복처럼 인간의 정신력에 도전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1마일 4분 벽은 허술해졌다. 한 달 만에 10명이 4분 이내로 달렸다. 심리적 장벽이 무너지자 달성 가능한 대상이 된 것이다. 지금 세계 기록은 히캄 엘 게루즈(모로코)가 1999년에 세운 3분43초13이다.
윤영길 한국체대 스포츠심리학과 교수는 “(마의 벽은) 한 집단 내에서 내린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영역, ‘이건 못 넘어간다’고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학습된 무력감, 집단무의식의 반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누군가 벽을 넘어서면 그 성공 경험이 지렛대로 작용한다. 윤 교수는 “벽으로 인식했다가도 에너지가 모이면 어느 순간 벽을 넘어서게 되고, 다시 벽을 마주하는 집단무의식이 반복된다. 그러나 절대적인 벽은 존재한다”며 “인간은 새나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무한히 깰 수는 없다. 흔히 말하는 마의 벽은 절대적인 벽과 달성 가능한 벽 사이의 어느 지점”이라고 했다.
한국 육상에서 마의 벽은 ‘100m 10초’가 대표적이다. 한국인의 신체 조건으론 ‘불가능하다’고 여겼지만, 지금은 달성할 수 있다는 게 중론이다. 지난해 고등부 최고 기록(10초30)을 달성한 나마디 조엘진(19), 지난 6일 익산 전국육상대회에서 역대 다섯 번째 기록인 10초20으로 우승한 김시온(26) 등이 유망주다.
100m 한국 기록은 2017년 김국영(34)이 달성한 10초07이다. 역대 5위 기록은 김국영에 이어 김태효(10초17), 이준혁(10초18), 주지명(10초19), 김시온 순. 모두 현역이다. 김국영 전 고(故) 서말구의 기록(10초34)은 31년간 한국 기록을 유지했다.
장재근(63) 전 진천선수촌장은 “한국 선수들의 능력을 볼 때 (100m 9초대 진입이) 충분하다고 본다. 일본·중국이 하는데 우리가 못 할 이유가 없다”며 “다만 죽도록 훈련해야 한다. 좋은 코치, 좋은 프로그램, 시스템도 중요하지만, 선수 본인의 열정 열망이 가장 우선”이라고 했다. 그가 1985년에 세운 200m 한국 기록(20초41)은 33년간 유지됐다.
세계 최초로 ‘100m 10초’ 벽을 깬 선수는 짐 하인스(미국)로 1968년 9초95를 기록했다. 현재 세계 기록은 우사인 볼트(39·자메이카)가 2009년 세운 9초58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