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행동경제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인간이 절대적 결과보다 기대와의 차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이른바 ‘기대 불일치’ 이론의 핵심 원칙으로, 고객 만족은 실제 경험이 사전 기대를 얼마나 넘어서거나 밑도는지에 좌우된다는 주장과 맞닿아 있다.
이 원리는 한국 퇴직연금 시장의 고질적 문제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많은 가입자는 금융회사가 자신의 노후 자산을 적극적으로 운용해 주기를 기대한다. 현실은 정반대다. 금융회사는 상품 설명과 일반적인 투자 조언만 제공할 수 있으며, 최종 투자 결정은 가입자 본인의 몫이다. 전문적 관리를 기대했던 가입자들이 실질적으로는 투자 결정을 스스로 내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상당수는 적극적 자산 운용 대신 예금 등 안전 자산 위주의 수동적 전략을 택한다. 그 결과, 장기 수익률은 낮을 수밖에 없다.
수익률 제고를 위해 도입된 ‘디폴트 옵션’ 제도도 동일한 한계를 드러낸다. 미국 등 연금 선진국에서는 디폴트 옵션이 전문적으로 설계된 포트폴리오를 자동 적용하는 방식으로 운용되지만, 한국에서는 가입자가 직접 투자 유형을 선택해야 한다. 이는 제도의 본래 취지를 약화시키는 구조적 제약이다.
이 같은 배경에서 최근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 도입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기금형은 기존의 계약형과 달리, 독립된 기금을 설립하고 전문 운용조직이 자산을 통합 운용하는 방식이다. 이는 가입자의 ‘전문 운용 기대’와 ‘자기 책임 현실’ 사이의 괴리를 해소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금융회사들의 입장은 엇갈린다. 일반적으로 시장점유율이 높은 대형 금융회사일수록 기금형 도입에 소극적이다. 제도 전환이 기존 시장지배력 약화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입자의 불신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변화 회피는 오히려 시장 전체의 신뢰 기반을 훼손할 수 있다.
기금형 제도가 실질적인 수익률 개선과 제도 활성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선결 조건이 있다. 첫째, 공적 기관의 참여는 제한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공공부문의 광범위한 개입은 민간의 경쟁과 자율성을 저해하고, 연금시장의 균형을 흔들 수 있다. 공적기관 참여는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처럼 30인 미만 기업에 한정하는 것이 적절하다. 둘째, 기금 설치와 운영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불필요한 중복 비용은 결국 가입자의 수익률을 잠식한다.
퇴직연금은 국민 노후의 보완적 수단이지만, 공적연금과는 달리 민간의 자율성과 경쟁을 전제로 한다. 시장의 기본 원칙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가입자의 기대에 부응하는 제도 개혁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