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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미 야당 원내대표가 보여준 ‘의회 투쟁의 정석’

중앙일보

2025.07.07 08:14 2025.07.07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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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구 워싱턴 총국장
불에 타는 성조기, 뿌연 최루가스, 진압 작전에 투입된 해병대.

불법 이민자 과잉 단속으로 촉발된 지난달 초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사태 때 전 세계에 노출된 장면들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지난달 14일 워싱턴 DC에서 열린 미 육군 창설 250주년 기념 열병식. 같은 날 생일을 맞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위해 예포 21발이 발사됐고 사람들은 “USA”를 연호했지만, 다른 한쪽에선 ‘노 킹(No King·왕은 없다)’이란 이름의 대규모 반(反)트럼프 시위가 열렸다.

지난 3일 미국 하원 본회의장에서 연설 중인 하킴 제프리스 민주당 원내대표. [로이터=연합뉴스]
LA 사태와 ‘노 킹’ 집회 등을 접하며 미 국무부 베테랑 외교관 출신 한 인사는 며칠 전 기자에게 “미국은 준내전 상태”라고 했다. 극단과 혼란의 한가운데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우려에서 한 말이었다. 이러한 살풍경 속에서 지난 3일 하킴 제프리스 민주당 원내대표의 ‘8시간 45분 연설’은 유독 신선하게 느껴졌다. 미국의 의회 정치만큼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일깨워줬다고나 할까.

제프리스의 마라톤 연설은 트럼프 대통령이 밀어붙인 ‘크고 아름다운 법안’을 저지하기 위해 야당 원내 사령탑으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었다. 의사 진행을 막기 위한 목적의 필리버스터(무제한 연설)는 상원에만 있지만, 하원에서 당 원내대표에 한해 사실상 시간제한 없는 발언권을 인정해주는 의회 관행을 활용한 지연 전술이었다.

제프리스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4시 53분 “이 법안이 미국인들 삶에 얼마나 큰 해악이 될지 분명히 말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며 연설을 시작해 오후 1시 38분까지 연단 마이크를 놓지 않았다. 감세 항목이 부자에게 유리하며 연방정부 부채 부담을 키운다는 점 등을 하나하나 짚었고, 사회안전망 예산 삭감으로 앞날이 막막해졌다는 지역 주민 편지를 낭독하기도 했다.

법안은 민주당 의원 전원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통과되고 말았다. 예상된 패배였다. 그럼에도 제프리스 원내대표의 ‘품격 있는 저항’은 사람들에게 묵직한 울림을 줬다. 상대를 비방하기보다 논리로 설득하려 했고 민주당이 무엇에, 그리고 왜 반대하는지를 또렷하게 각인시켰다.

제프리스의 8시간 45분은 한국 정치에도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난무하는 고성과 욕설에 육탄전, 한때 빠루와 망치까지 등장했던 ‘동물국회’는 과연 졸업했나. 공수만 바뀐 채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여야를 보면 품격과는 거리가 멀다. 제프리스가 보여준 ‘의회 투쟁의 정석’을 제대로 배웠으면 한다.





김형구([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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