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가가 축제 분위기로 들뜬 지난 5월 말, 모 대학 정치외교학과 학생회가 주최한 주점 홍보 포스터가 논란이 됐다.
‘계엄, 때렸수다’라는 주점 이름, ‘이재명이나물삼겹살’ ‘윤석열라맛있는두부김치’ ‘속이 꽉 찬 계엄말이’ 등 메뉴명이 12·3 내란을 희화화했다는 비판에 직면한 것이다.
‘현실 정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려 했다’는 해명도 소용없었다. ‘계엄이 장난인가’ ‘목숨 걸고 민주주의를 지킨 너희 선배들이 통곡할 일’ ‘정외과 학생들의 현실 인식이 저 정도라니 암울하다’ 등의 비난이 쏟아졌다. ‘민주주의를 가벼이 여기지 말라’는 대자보가 교내에 붙기도 했다.
계엄 희화화한 대학가 주점 논란
편향된 시각의 정치영화 잇따라
균형잡힌 시선의 영화 나왔으면
MZ세대의 재기발랄한 정치 풍자라 하기엔, 너무 선을 넘었다. 촌철살인의 메시지도 없을뿐더러, 대상 또한 부적절했다. 메뉴판엔 ‘좌파게티’도 포함돼 있었다. 극우 성향 커뮤니티인 일베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다. 일베 문화가 이렇게까지 젊은 층에 파고들었나 하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착잡했다.
일베는 진보 정치세력, 호남, 여성, 사회적 소수자(외국인 노동자, 장애인 등)를 혐오한다. 이들에 대한 혐오를 드립(즉흥적 농담)과 밈(온라인 유행 콘텐트)에 실어 나른다. 광주 민주화운동, 세월호 참사 등의 비극을 조롱하고 희화화하는 건 그들의 전매특허다.
그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일을 ‘중력절’이라 부른다. 만우절이나 다름없는 놀잇감이다. 연애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유명해진 한 전문직 남성도 그 날, SNS에 거꾸로 뒤집힌 썸네일 사진을 올려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패륜적이고 반사회적인 놀이가 젊은 층에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 극명히 보여준 사례다.
“애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원조 홍어’라 부르고, 전두환은 ‘전땅크’로 추앙해요. 정말 말문이 막힙니다.” 최근에 만난 교사 지인의 한숨 섞인 토로다. 석열이형(윤석열 전 대통령), ×통령(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혐오 표현) 등의 말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단다. 과잠 입고 윤석열 지지 집회에 나가 ‘윤 어게인!’을 외치는 대학생들의 행동 또한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건 마찬가지다.
선플보다 악플이 더 선명히 기억되는 것처럼, 균형 갖춘 의견보다 단순하고 극단화한 선동이 더 각인 효과가 큰 법이다. 판단력이 아직 여물지 않은 아이들에겐 더욱 그렇다. 그렇기에 ‘청소년 애국전사 양성’이란 목표 하에 초등생들에게 그릇된 역사 인식과 가치관을 주입하려 했던 리박스쿨의 늘봄학교는 정말로 위험천만한 시도였다. 정권 교체로 좌절됐기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일베라는 왜곡된 필터로 세상을 보고, 학교에서 편향된 역사를 배운 아이들이 미래의 유권자가 되는, 암울한 세상이 올 뻔했다.
얼마 전 한 원로 영화인의 부적절한 발언도 입맛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현대사를 조망한 다큐 ‘하보우만의 약속’을 연출한 이장호 감독은 지난 4월 기자간담회에서 이승만·박정희 두 전 대통령의 공만 너무 부각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공에 비하면 과는 지극히 사소하고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맥락과 다양한 견해는 무시한 채 역사의 한쪽 면만 조명한 작품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업적을 그려 117만 관객을 모은 ‘건국전쟁’의 대척점에 선 ‘망국전쟁: 뉴라이트의 시작’이란 다큐도 곧 개봉한다. 극장이 역사관의 전쟁터로 변해가고 있다. 균형 잡힌 역사를 기록하고 가르치려는 노력이 더욱 중요하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와중에 영화 ‘국제시장2’가 제작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전편의 주인공 덕수(황정민)와 함께 독일 광부로 파견됐던 아버지(이성민), 민주화운동을 목도하고 삶의 변화를 맞게 되는 서울대생 아들(강하늘)이 주인공이다. 1970년대부터 6월 민주항쟁, IMF 외환위기, 2002년 한일 월드컵 등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관통하는 스토리다.
제작사 관계자는 “산업화 세대인 아버지와 민주화 세대인 아들이 갈등하고 싸우다가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그려낼 것”이라고 말했다. 11년 전 ‘국제시장’ 개봉 때 우파 영화라는 비난을 받고 괴로워하던 윤제균 감독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 역사가 산업화와 민주화, 두 개의 바퀴로 굴러왔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줄 속편이 됐으면 한다. 모든 걸 자율에 맡겨 키운 대학생 아들에게 딱 하나 당부했던 게 있다. “일베 게시물로 정치나 역사를 배우지 말라”는 것. 내년에 ‘국제시장2’가 개봉하면 아들과 함께 보러 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