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국내 정치는 탄핵과 새 정부 출범으로 요동쳤지만, 주요국들은 대전환 시대에 걸맞게 자국의 국가전략을 수정해 나가고 있다.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이 4월에 발표한 보고서(‘100일간의 아메리카 퍼스트’)는 트럼프 행정부 첫 100일간 전개한 외교정책의 성과와 전략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 우선 외교정책’, ‘공정한 경제와 무역 관계 구축’ 등 6개 주제로 구성된 보고서는 “미국이 지출하는 모든 달러, 지원 프로그램, 대외 정책은 다음 셋 중 하나의 질문-보다 안전하고, 보다 강하고, 보다 풍요로운 미국을 위한 정책인가-에 답해야 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미국 제일주의와 국익 우선주의의 정점이라 할 것이다.
미국, 이해관계 좇아 다각적 협력
중국, 중화패권 부활에 전력 쏟아
한국도 중동·남미로 외연 넓혀야
한편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최근 ‘중국-라틴 아메리카 공동의 미래’ 및 ‘기후·환경 리더스’ 국제행사에서 밝힌 연설 내용은, 중국의 대외 전략이 트럼프 행정부와 뚜렷이 대비됨을 보여준다. 미국이 축소한 해외 원조와 개발 협력을 확대하고, 기후·환경·에너지전환을 위해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을 천명하고 있다. 연대(Solidarity), 개발, 문명화, 평화, 인적 연결 등 5개 프로그램을 축으로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에 대한 협력 관계를 깊이 있게 구축할 것이며, 기후·환경 등 글로벌 공공재에 대해서는 다자주의, 국제협력, ‘정의로운’ 전환을 기조로 해결해 나갈 것을 선언했다. 중국이 국제사회의 보편적 규범과 제도 영역으로 진입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트럼프 2기 첫 조치로 주목받았던 국제개발처(USAID) 예산의 85%(800억 달러) 삭감과 기존 원조 사업들의 축소를 들어 미국의 리더십과 소프트파워가 약화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이러한 시각은 일면 타당하나 미국의 국가 전략과 향후 지향점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원조 예산 삭감 그 자체만으로 미국의 영향력 쇠퇴의 징후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보고서에 담긴 국가만도 40여 개국 이상으로 중국·러시아·북한·이란에 대해서는 위협 및 적성국으로 분류해 선제적 억제전략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파나마를 비롯한 중남미 국가들에 대해서는 중국 일대일로 사업 철회, 이라크와는 이란 견제를 위해 300억 달러에 이르는 경제협력 추진,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는 천연광물 공급망 확보 등, 대외 원조와 국제기구 분담금 축소로 발생한 가용 재원을 양자 중심의 선택적 경제·안보협력 전략으로 전환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 당국이 발표하는 공식 문건들만 보면 마치 미국의 민주당 정부가 지향했던 자유주의 기반 다자주의와 해외 원조를 활용한 글로벌 책무성의 실천이라고 보일 만큼 유사성이 크게 느껴진다. 그러나 행간의 의미를 들여다보면, (중국 중심) 다자주의, (중국 국익) 국제개발 협력, (중국 문화 확산) 문명화를 지향하고 있다.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 ‘안보는 미국에, 경제는 중국에 의존한다’는 ‘안미경중’과 같은 이분적 접근은 다중 균형 전략이 요구되는 현실에 더는 부합하지 않는다. 이상에 치우친 균형자론 역시 달성 불가한 전략이다. ‘한반도 천동설’(『우리는 미국을 모른다』 김동현 저)에서 벗어나야 한다. 특정 담론과 일방의 시각에 치우쳐 우리의 전략적 공간을 스스로 축소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북한의 위협에 최적의 대응 태세를 유지하되, 아·태 전략과 인·태 전략에 호응하는 국가전략의 지평을 확장해야 한다.
동남아시아는 물론 남미·동유럽·중동을 아우르는 ‘안보와 평화를 위한 해양 국제협력’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AI 시대 디지털 전환, 친환경 에너지, 분쟁 지역의 복구와 재건은 모두 한국이 경험과 역량을 축적해온 분야로, 국제사회에서 기대와 요청도 한층 높아질 것이다. 개발 협력이 국내 자원을 소진한다는 협소한 시각에서 벗어나 국내 산업과 경제 활성화를 촉진하는 경제-외교-국방 융합 전략 수단임을 인식해야 한다. 올해는 마침 국제개발 협력의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는 제4차 국제개발 협력 기본계획과 중점협력국 선정이 이루어지는 해이다. 국제사회의 거대한 흐름을 읽어내고, 우리의 국격을 높일 수 있는 중장기 대응 전략을 수립할 좋은 기회가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