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월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가 올해 30주년을 맞았지만, 세계무역질서는 지금 아노미 상태로 빠져들고 있다. 트럼프 2기 미국 정부의 공세적 보호무역주의 노선의 영향으로 자유주의 무역질서가 근본부터 휘청거린다. 특히 2001년 12월 중국이 WTO 가입 이후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무기로 미국 패권에 도전하자 미국은 보호무역주의로 돌아가려 하고, 역설적으로 중국은 자유무역 질서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관세 전쟁을 발동한 트럼프 정부의 상호관세 유예 시한(8일)을 코앞에 두고 미국은 한국·일본에 25% 상호관세를 8월 1일부터 부과하겠다고 적시한 트럼프 대통령 명의의 서한을 7일(현지시간) 전격 발송했다. 미국은 이번에 12개국에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에 앞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지난 주말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관세 협상과 유예 기간 연장 등을 협의하기 위해,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관세 및 정상회담 조율 등을 위해 워싱턴DC로 급히 날아갔다.
통상 문제 전문가들은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고 있을까. 국제통상 분야 권위자인 최병일(67) 이화여대 명예교수(법무법인 태평양 통상전략혁신허브 원장)와 WTO 공채시험에 합격한 한국인 민간인 1호이자 국제통상법 박사인 이준영(48) 통상·환경·기후변화 담당관의 생각을 각각 들어봤다. 먼저 최 원장과의 문답.
미·중 갈등으로 WTO 위기 처해
미 스스로 WTO 체제 뛰쳐나와 한·일 관계 좋아 CPTPP 가입을
Q : -유예된 상호관세 협상 시한이 됐다.
A : "트럼프가 4월 2일 57개국을 상대로 국가별 맞춤형 상호관세를 일방적으로 발표하고, 그가 정한 90일 협상 시한이 끝났지만 영국 등 극히 일부 국가와만 협상이 타결됐다. 스콧 베센트 재무장관은 협상 시한 연장을 예고했다."
Q : -수출 타격이 큰 한국의 상황을 평가하면.
A : "트럼프는 한국에 25% 상호관세를, 철강·알루미늄에는 50% 관세를, 자동차와 부품에는 25% 등 품목별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한국이 미국을 상대로 무역수지 흑자(2024년 557억 달러)를 기록하고 있지만, 한국은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국가라 대부분 무관세를 적용해 왔다. 트럼프는 국가안보와 국가비상사태를 근거로 고율 관세를 부과하면서도 FTA를 체결한 한국엔 아무런 협의조차 없었다."
Q : -이재명 정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A : "2017년 트럼프 1기 시절 한·미 FTA 폐기 위협에 내몰린 한국은 미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재협상까지 해 줬는데 트럼프 2기 들어 FTA 체결국에 대한 신뢰를 내동댕이친 느낌이다. 탄핵 화중에 이런 점을 제대로 부각하지 않은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으로 이제 새 정부가 출범했기 때문에 주권국, 동맹국, FTA 체결국, 최대의 제조업 투자국이란 사실을 적절히 반영해 관세 위협을 극복하고 신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큰 그림을 그릴 때다."
한국 기업의 대미투자 애로 전달해야
-구체적 협상 전략을 조언한다면.
A : "한국의 협상가는 두 가지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 첫째, FTA 체결국인 한국에 부과한 품목별 관세와 상호관세는 철폐해야 마땅하다. 둘째, 한국은 미국의 첨단제조업 부활에 최적의 파트너란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한·미 첨단제조업 협력을 위해서는 한국기업의 대미 투자 애로 요인을 해결해 달라는 핵심 메시지를 설득력 있게 전달해야 한다. 미국 제조업 부활과 미·중 경쟁에서 미국 우위를 확보하려는 트럼프에게 한국 제조업이 기여할 분야를 찾아내고, 해당 분야 대미 투자 확대와 한국 기업의 투자 애로 요인 해결을 맞바꾸는 협상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
Q : -자유무역 질서를 수호해온 미국이 보호무역을 외치는 세상이다.
A : "트럼프가 57개국에 상호관세를 발표한 지난 4월 2일을 훗날 역사는 '미국이 스스로 설계한 WTO 다자무역체제를 스스로 뛰쳐나온 날'로 기록할 것이다. 다자체제의 근간인 '최혜국대우(MFN) 원칙'이 무시됐다. 트럼프 1기 때부터 미국은 자유무역 아닌 공정무역을 외쳤고, 민주당 바이든 집권 시기에도 WTO 체제를 복원하려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다자무역체제 수호"만 외치면 낙오
Q : -미·중의 장군멍군 관세 전쟁은 어떻게 될까.
A : "미국은 중국의 지속적 시장 개방과 정치 유연화를 기대하며 중국을 WTO에 가입시켰으나 이제는 중국이 변화할 거란 기대를 접었다. WTO 다자통상 규범이 붕괴하고 있는 이유는 미·중 통상 갈등의 해법을 다자통상체제 안에서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핵심 첨단 분야의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 의존을 벗어나려는 미국의 정책 의지는 초당적이다. 미·중 관세전쟁이 어떤 결말이 나든 우위를 확보하려는 미국, 역전을 노리는 중국의 기술패권 경쟁은 지속할 것이다."
Q : -WTO 체제 위기에서 한국의 생존 전략은.
A : "한국을 제조업 대국과 선진 경제로 견인하는데 결정적 환경을 제공한 다자무역체제의 올드 노멀(Old Normal)이 이제는 힘에 의존하는 관리무역체제라는 뉴 노멀(new normal)로 바뀌고 있다. 미국은 올드 노멀로 회귀할 가능성이 희박하고, 중국은 올드 노멀을 지켜낼 역량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도 'WTO 다자체제 수호'만 지고지선으로 외치는 정책으론 낙오자가 될 뿐이다. 지금 가장 높은 수준의 메가 FTA인 CPTPP(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는 최근 영국이 가입하면서 존재감과 위상이 더 높아졌다. 개방된 세계시장 확보가 중요한 한국이 뉴노멀 시대에 CPTPP 체제 바깥에 머문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한·일 관계가 개선된 지금이 가입할 기회다. 다만 국내 정치적 압력 극복 여부에 달려 있다."
이준영 담당관은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WTO에 2007년 들어가 이후 18년째 활동하고 있다. 한국외대에서 중국어와 아랍어를 전공한 그는 고려대에서 국제법 석사를, 스위스 제네바국제대학원에서 국제법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어·중국어·아랍어·프랑스어를 구사하는 글로벌 인재다.
회원국 166개국으로 확대 성과 위기의 WTO, 성장통 극복 숙제
통상국가 한국, 의제설정 선도를
Q : -출범 30주년을 맞은 WTO의 성과는.
A : "1995년 탄생 이후 WTO는 다자무역체제의 선봉장으로 성장했다. 123개 회원국으로 시작해 대만·러시아·베트남·중국 등이 가입하면서 이제 166개국으로 확대됐다. 10년이 넘는 지난한 협상 과정을 통해 새로운 회원국을 다자무역 체제로 끌어들인 것이 최대 성과다."
WTO 성과와 한계는 동전의 앞뒷면
Q : -트럼프 시대에 WTO 위기론이 거론된다.
A : "유엔 등 다른 국제기구와 달리 WTO의 의사결정은 회원국 전체가 동의해야만 어떤 안건에 대한 의사결정이 이뤄진다. (이해관계가 복잡해지면서) 166개 회원국 전체가 다 같이 동의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 다자무역체제의 한계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WTO의 최대 성과와 한계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맞닿아 있다. 어떤 체제든 회원국들이 존중해야 하는 기본원칙이 흔들리는 시기는 언제든지 올 수 있는데 2025년의 WTO가 바로 그 시기에 와 있다는 느낌이 든다. 지금의 성장통을 잘 이겨낸 뒤에는 더 세련된 체제가 탄생할 거라 확신한다."
Q : -한국은 그 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A : "통상이 한국 국내총생산(GDP)에 주는 영향이 큰 만큼 다자무역체제에서 리더 역할을 하는 것은 어쩌면 숙명적이다. 한국은 무역과 통상으로 일어선 나라이기 때문에 세계무역과 통상의 구심점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할 도의적인 의무도 있다. 다자외교에서 위상을 높이려면 의제 설정(Agenda setting)을 잘해야 한다. 한국은 WTO의 다양한 분야에서 선진국·개발도상국·최빈개도국 등 어느 한 입장에 치우치지 않고 의제 설정을 할 수 있다. 한국은 1967년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체제 가입 이후 지금까지 이들 세 범주에 속해본 다양한 경험이 있기에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다."
중국 공무원들, WTO에서 역량 발휘중
Q : -WTO에서 중국의 존재감이 얼마나 커졌나.
A : "중국의 존재감은 2001년 12월 WTO 가입 이후의 고속 경제 성장뿐 아니라 눈에 띄는 중국 통상 공무원들의 역량 향상에서 느껴진다. 제네바 통상 무대에서 중국은 자국의 관심 분야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와 중요 안건에서 구체적 입장을 제시하고, 관련국을 설득하고, 지지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능력을 잘 발휘하고 있다."
Q : -보호무역주의의 결말을 어떻게 전망하나.
A : "코로나19 사태를 경험하면서 한 가지 뚜렷하게 느낀 것은 지구에서 그 어떤 나라도 모든 자원을 스스로 충족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무역·통상도 마찬가지다. 세계 경제의 원활한 공급망 편입 및 그에 따른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려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성립된 GATT 체제 때는 물론이고, WTO 체제에서도 강조해온 비차별주의와 투명성 원칙을 존중해야 한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Q : -한국의 통상 전략을 조언한다면.
A : "제네바에서 일하면서 발견한 공통분모는 '다변화'다. 무역 파트너뿐 아니라 상품·서비스 등 모든 것에서 다변화를 최대한 추구하는 것이 요즘 많은 정부는 물론 기업·학계의 공통된 화두다. 통상·무역 분야에서는 특히 인내심을 갖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상생하도록 최대한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