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후 지난 한 달은 모처럼 평온했다. 정치를 잊고 살았다. 보수가 지리멸렬해지자 진보는 싱겁다는 듯 전열 정비로 돌아섰다. 진보 유권자들은 표정 관리에 들어갔고 보수는 한(恨)을 갈무리했다. 그래서인지 취임 한 달 기자회견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날을 세우지 않았다. 시청자들은 이 대통령의 달변과 눙치기에 빨려들었다. 지역행정가에서 통치자로의 재빠른 변신은 놀라울 정도였다.
국민과의 첫 대면엔 긴장이 흐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계급장 떼고 토론하던 자리에서 역정을 냈다. ‘막 가자는 것이지요?’ 어느 간 큰 검사가 대들자 찬물을 끼얹었다. 토론회장이 얼어붙었다. 문재인은 광화문 시대를 요란하게 공언했고, 이명박은 4대강 사업을, 박근혜는 국민행복을, 윤석열은 4대 개혁을 비장한 톤으로 선포했다. 검찰개혁이든, 노동개혁이든 첫 대면에서 공포한 공약들은 정권 내내 무거운 짐이 됐다.
기자회견에서 돋보인 양손 전략
오랜 투쟁에도 혁신 목표는 흐릿
정치양극화 해소와 AI혁명 위해
불평등 타개와 정책 유연성 필요
이 대통령은 그걸 눈치챘다. 취임 시 확약한 대국민 약속은 끝내 정권의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을. 유연하고 의뭉스러운 언술, 책임 분산의 달인이었다. 넘기고, 미루고, 합쳤다. 검찰개혁 같은 예민한 사안은 국회로 넘겼고, 관세 협상은 어찌 될지 모른다고 미뤘으며, 대일(對日)·대북(對北) 정책은 과거와 현재를 합친 어중간한 어투로 말했다. 집값 대책은 맛보기, 주머니 속에 큼직한 게 많다고 했다. 혹, 주머니가 비었을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두 가지였다. 전국민지원금 지급과 악성 부채 탕감. 일인당 25만원 쿠폰은 지금의 구둣값, 과거에는 고무신값에 해당한다. 당선사례로 제격이다. 포퓰리스트적 성향은 분명했던 반면, 통치 사안은 ‘심사숙고 중’, 예민한 쟁점은 국회로 넘기는 ‘양손 전략’의 야시(夜市)였다.
아직 좀 이르다 해도 대체 이재명 정부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렇게 긴 세월을 대권 투쟁에 올인했다면 점령 깃발에 뭔가 써야 하는 것 아닌가? 정치 난국을 마감하고 시대와 국민을 안전지대로 인도하는 이정표 말이다. 필자라면 이렇게 말하겠다. 정치 양극화 또는 적대 정치의 청산. 이 대통령은 여소야대 상황에서 ‘아마 윤 대통령이 힘들었을 것’이라고 남 얘기하듯 말했다. 여대야소라서 괜찮다는 얘기인가? 협치를 망가뜨린 공동의 죗값은 어디로 갔으며, 특단의 치유책은 무엇인가?
미국의 경제학자 크루그만(P. Krugmann)은 『진보의 양심』(2008)에서 이렇게 단언했다. 정치양극화의 주범은 소득불평등 악화라고. 미국과 선진국에 두루 적용되는 이 명제는 한국에는 더욱 절실하다. 일인당 국민소득 3만6000달러 시대에 소득불평등은 악화일로다. 자산불평등은 더욱 심해서 절대적 박탈감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기자회견이 산만했다 해도, 정치 양극화의 배후가 소득 및 재산불평등이란 엄중한 사실을 왜 적시하지 않는가? 좌파다운 비장의 대안이 없다는 뜻일까?
정치양극화로 연명한 좌우파 정치인들의 양식(糧食)은 달랐다. 좌파가 먹어치운 것은 분노·불만·차별이었고, 우파는 신분 상승과 성공스토리를 즐겨 먹었다. 그런데 우파적 성장의 낙수효과는 허상으로 판명됐고, 세금과 복지에 쏟은 좌파 정책은 매번 빗나갔다. 그래서 ‘실용정부’란다. 이 애매하고 임기응변적 통치 개념을 내놓으려 4년 세월을 망친 보수와 그토록 처절하게 싸웠는가?
한국의 불평등은 주택과 고용이 좌우한다. 좌파의 집값 대책은 치명적이었고, 고용은 이보다 더 잔혹했음은 누구나 다 안다. 청년세대는 허름한 비정규직을 헤맸고, 정규직 노동자마저 ‘N잡러’로 내몰렸다. 퇴근 후 이중 잡(job)을 뛰는 사람이 여전히 넘쳐도 좌파 정부는 워라밸을 선전했다. 정권을 넘겨받은 586 혁명꾼들이 지금도 그러하다면 ‘당신들의 천국’일 뿐이다.
유럽의 좌파정권은 고용안정에 사활을 건다. 성장·복지·고용의 황금삼각형이 좌파의 창안물이라면 믿을까. 삼각형의 선순환을 위해 노조는 임금양보와 탄력적 노동시간제를 권장한다. 여기에는 복지가 따른다. 스웨덴의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이 본보기다. 고용노동부 장관에 지명된 김영훈 전 민노총위원장은 이런 구도를 인지하고 있을까. 대기업 중심인 민노총이 N잡러의 비애와 저임 노동자에 관심을 둘지는 의문스럽다. AI 100조원은 주52시간제에 걸려 허비될 것이다. 중국 AI굴기엔 007이 있다. 0시 출근 0시 퇴근, 주7일 연구로 날밤을 새운다. 거론되는 주 4.5일제는 대기업 노조의 꿈이고, 노란봉투법은 경영진을 일 년 내내 노사교섭 전선에 내몰 것인데, 어느 세월에 불평등 완화와 AI혁명을 이룰까. 만약 김영훈 후보자가 진정한 좌파답게 임금양보와 탄력성을 언급한다면, 즉각 탄핵받을지 모른다. 탄핵은 자기 진영을 겨냥한 대공포화가 될 것이다.
이 대통령의 첫 기자회견은 싱겁고 맥빠졌다. 유연한 어법은 돋보였으나 불평등 혁신이나 정책 유연성은 없었다. 진짜 좌파의 양식(良識)은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