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무대서 지휘봉…EU 지원금 투입에 반발 가열
우크라전 개전 이래 유지돼온 서방측 보이콧 무너져
친푸틴 지휘자 게르기예프, 서방 공연 재개 논란
이탈리아 무대서 지휘봉…EU 지원금 투입에 반발 가열
우크라전 개전 이래 유지돼온 서방측 보이콧 무너져
(서울=연합뉴스) 임화섭 기자 = 수십년간 친(親) 푸틴 성향을 공공연히 드러내 온 러시아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72)가 이달 하순 이탈리아 무대에 서게 돼 논란이 일고 있다.
해당 공연은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래 서방 측 예술기관들이 유지해온 게르기예프에 대한 보이콧을 3년 반 만에 깨뜨리는 것이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게르기예프는 이달 27일 이탈리아 캄파니아주 카세르타 왕궁에서 열리는 '교향악 음악회'에 지휘자로 출연할 예정이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 소속 솔리스트들과 이탈리아 살레르노 극장의 '주세페 베르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함께 출연한다.
이 공연은 이달 19∼31일 카세르타 왕궁에서 열리는 여름음악축제의 일부로 기획됐으며, 일정은 지난주에 공개됐으나 구체적 공연 곡목은 발표되지 않았다.
게르기예프의 카세르타에서 지휘봉을 잡는다는 소식에 이탈리아 정치인들과 활동가들은 이에 반대하는 성명을 잇따라 냈다.
게르기예프는 NYT의 논평 요청에 답하지 않았다.
그가 출연하게 된 여름음악축제는 후원 주체인 이탈리아 정부와 캄파니아 지방정부에 유럽연합(EU)의 지원금이 투입되는 행사여서 반대 여론이 더욱 거세다.
EU가 제공한 자금이 EU의 최대 안보위협인 러시아 푸틴 정권을 앞장서서 옹호해 온 어용 음악가에게 흘러들어가게 됐기 때문이다.
피나 피치에르노 유럽의회(EP) 부의장은 소셜 미디어 X에서 "발레리 게르기예프의 참여를 막고 납세자들의 돈이 범죄 정권 지지자의 호주머니에 들어가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라고 축제 주최측과 캄파니아 지역 공무원들에게 촉구했다.
이에 대해 빈첸초 데 루카 캄파니아 주지사는 게르기예프를 초청한 것이 "사람들 사이의 대화가 성장할 수 있고 인간 연대의 가치가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라며 행사 주최측 결정을 옹호했다.
게르기예프는 러시아에서 '음악 차르'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1996년부터 지금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 예술감독 겸 총감독을 맡고 있으며, 2023년 12월부터는 모스크바의 러시아 볼쇼이 극장 총감독까지 겸임하고 있다.
러시아를 대표하는 양대 공연예술기관을 한 사람이 동시에 장악한 것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다.
게르기예프는 마린스키 극장 음악감독이던 1990년대 초부터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시 공무원이던 블라디미르 푸틴 현 러시아 대통령과 친분을 쌓아왔으며, 선거에서 푸틴 지지선언을 해주고 국내외에서 푸틴 정책 홍보에 앞장서는 등 수십년간 노골적인 친푸틴 행보를 계속하면서 전폭적 지원을 받아왔다.
특히 2012년 대선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TV 광고에 출연했으며,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도 공개 지지했다.
게르기예프는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까지는 미국과 서유럽 등 러시아 밖에서도 매우 자주 공연을 했을 뿐만 아니라 주요 직책도 여럿 맡고 있었다.
그는 1995∼2007년 네덜란드 로테르담 필하모닉 수석지휘자, 2007∼2015년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수석지휘자를 지냈으며, 2015년에는 독일 뮌헨 필하모닉 수석지휘자로 취임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전을 계기로 서방 측 공연예술기관들과 단체들은 게르기예프를 포함한 친푸틴 예술가들에게 침공을 규탄하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히라고 요구하면서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출연을 불허하겠다고 통보했다.
게르기예프는 요구를 거부하고 뮌헨 필하모닉 수석지휘자, 베르비에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스웨덴 왕립음악아카데미 외국인회원 등 직책을 그만뒀으며, 그 후로는 러시아와 중국에서 주로 공연했고 서유럽과 북미 등 서방권에서는 공연을 하지 못했다.
다만 스페인 기획사 이베르카메라는 내년 바르셀로나에서 게르기예프와 마린스키 극장 오케스트라가 출연하는 공연을 기획중이라고 지난달 초 밝혔으며, 이 공연에도 EU 지원금이 투입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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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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