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도 등 근대산업시설 문제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정식 의제로 삼으려던 한·일 간 표 대결에서 한국이 패배하며 일본의 역사 왜곡 시도를 유네스코 틀에서 공론화하려는 전략에 제동이 걸렸다. 다만 초유의 표 대결을 거치면서 강제징용 역사를 알리겠다던 당초 약속을 저버린 일본의 민낯을 드러내는 성과도 있었다는 평가 역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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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역수정안에 허 찔려
7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47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 회의에선 '군함도 문제를 정식 의제로 다루지 말자'며 일본이 제기한 안건이 비밀 투표 결과 과반 득표로 채택됐다.
한·일을 포함한 전체 위원국 21개 중 총 15개국(찬성 7개국, 기권 8개국)이 군함도의 정식 의제화에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일본의 '군함도 배제' 안건에 반대한 국가는 한국을 포함해 3개국에 불과했다. 즉, 한국의 우군은 2개국 뿐이었다. 무효표는 3개국이었다.
일본은 "유산위가 아닌 한·일 간 양자 간 협의를 통해 문제를 풀겠다"고 했는데, 대부분 국가가 군함도 문제의 본질과는 별개로 이런 방식에 공감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유산위는 2018·2021·2023년 세 차례의 결정을 통해 일본의 군함도 후속 조치 미이행 문제를 지적하는 등 사안의 본질과 관련해서는 과거사 직시를 요구해 왔다.
국가 간 갈등이 얽힌 유산에 대해 유산위가 한쪽 편을 들기 꺼려 하는 것도 현실이다. 유네스코에서 역사 문제로 압도적인 공감 여론을 조성하는 건 쉽지 않다는 뜻이다. 외교부 당국자가 이번 회의에 앞서 “유산위는 원래 표결이 잦은 곳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은 유네스코의 절차법도 교묘하게 활용했다. 수정안 제출은 언제든 가능하다는 점을 이용해 '군함도 문제를 정식 의제로 다루자'는 한국의 수정안에 반대하는 역(逆)수정안을 회의 도중에 제출해 한국의 허를 찔렀다.
또 유네스코에서는 동일 사안에 대해 더 최근에 제출한 수정안을 다루게 돼 있다. 결국 일본 안이 표결에 부쳐진 이유다. 이 때문에 위원국들은 '군함도 문제를 정식 의제로 다루자는 한국의 제안을 삭제하자'는 복잡한 안에 투표를 하게 됐다.
그럼에도 정부가 사상 초유의 한·일 간 표 대결을 불사할 때는 물밑 여론을 면밀히 파악하고 지지를 얻도록 설득하는 노력을 더 기울였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결과적으로는 승산이 낮은 '표 대결' 구도를 피하지 못하면서 유네스코에서 군함도 문제에 대한 논의 가능성을 스스로 좁힌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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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차원에선 '졌잘싸'
이처럼 이번 표결은 매년 유네스코에 한국의 3배 규모 분담금을 내는 일본의 로비력과 역사 문제에서 입장을 명확히 정리하기 어려운 유산위의 한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군함도의 정식 의제화를 포기하지 않은 배경에는 세계유산을 둘러싼 일본의 몽니를 더는 좌시할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일본은 컨센서스를 중시하는 유네스코의 관행을 자의적으로 활용해 왔다. 한국이 일본의 역사 왜곡 행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유네스코에서 표결까지 가자는 것이냐'는 식의 뻔뻔한 태도를 보이며 합의를 압박했다. 여기에 물러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 자체가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이번 표결의 대상이 일본의 수정안이었다는 건 결국 이런 컨센서스의 관행을 일본 스스로 깨며 자기 모순을 드러냈다는 뜻도 된다.
결과적으로는 패배로 이어졌지만 표결 과정에서 일본의 역사 왜곡 행태를 공개 비판한 것도 기록으로서 의미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하위영 외교부 유네스코협력 TF 팀장은 이날 회의에서 여러 차례 발언 기회를 요청해 "군함도 후속 조치 이행 안건은 애초에 종결된 적이 없다"며 "이 문제는 유산위 공동의 책임으로 다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일본이 전시물 등을 통해 조선인 노동자들이 가혹한 환경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린 사실을 왜곡하는 행태도 짚으며 "이는 단순한 누락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공개 회의이기 때문에 공론화 효과가 있다"며 "일본의 약속 미이행을 논의할 장으로 활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졌지만 잘 싸웠다'는 시나리오도 가능하기에 애초에 위험 부담이 큰 표결도 감수한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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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식 투트랙 외교 향방은
이번 유산위 회의에서 표결 가능성과 여파 등을 두고 외교부가 검토한 내용은 대통령실에도 보고됐으며, 최종 승인은 대통령실이 내렸다고 한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날 "근대산업시설 관련 의제가 정식 안건으로 채택되지 않아 유감"이라며 "앞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계속 제기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군함도 표결은 지난달 4일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한·일 간에 처음으로 불거진 과거사 갈등이다. 미래지향적 협력이 발목 잡히지 않도록 하되, 과거사 문제를 덮지 않고 원칙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투트랙' 대일 외교가 구체적으로 발현된 첫 사례라는 평가도 나온다.
다만 일본이 이전과 다름 없는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면서 과거사 문제가 다시 갈등의 불씨로 작용할 우려도 커졌다. 당장 또 다른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인 사도광산의 추도식 문제가 다음 시험대가 될 수 있다. 일본은 지난해 7월 사도광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때 한국을 포함한 위원국의 컨센서스를 얻기 위해 노동자를 기리는 추도식을 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추도사가 빠진 무성의한 추도식을 진행했고, 한국이 이에 불참하면서 파행으로 치달았다.
한·일은 오는 9월 이후로 올해 추도식 일정을 협의하고 있다. 외교부 당국자는 “추도사 등을 두고 어떤 조건이 충족돼야 (한국이) 추도식에 참석할 수 있을지 내부 검토를 하고 있다”며 “여러 의견을 듣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양국 간에는 방위백서 발간(7월), 야스쿠니 신사 참배(8월) 등 매년 반복되는 이른바 '캘린더 성 악재'가 도사리고 있다. 과거사 문제 관리가 이재명 정부 초기 대일 외교 향방을 가를 뇌관으로 꼽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