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미국의 대선전에서 유럽의 정치 지도자가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아니라 민주당 카멀라 해리스 후보를 드러내놓고 적극 지지했다고 가정해보자. 트럼프는 이 지도자에 대해 온갖 비난을 퍼부었을 터이고 집권 후 그 나라에 대한 제재 등도 거론했을 법하다. 그런데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는 유럽의 극우 정당을 지지하면서 선거전에 공개적으로 개입한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진영은 정치적 이념이 유사한 유럽 정당 세력의 대두를 도와 미국과 유럽 관계(대서양 관계)의 새판을 짜고자 한다.
유럽 각국 극우 정당 지지하면서
대서양 관계 새 판 짜는 마가 세력
서구의 가치 공동체 무너지는 중
지난달 1일 폴란드 대선의 결선 투표에서 반이민과 반유럽을 내세운 무소속 카롤 나브로츠키 후보가 50.89% 득표율로 당선됐다. 그는 제1야당 법과정의당(PiS)의 지지를 받았다. 출구 조사에서 근소한 차이로 이길 것으로 예상했던 집권 시민플랫폼(PO)의 라파우 트샤스코프스키 후보와는 1.78%포인트 차이에 불과했다. 이번 대선은 폴란드의 유럽연합(EU) 내 위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중요한 선거였다. 2023년 12월 총리로 취임한 도날트 투스크는 친유럽 통합적인 정책을 실행해왔고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이웃 나라 지원에 앞장섰다. 이런 정책은 유럽은 물론이고 국제 사회에서도 폴란드의 위상을 제고하는 데 기여했다. 그런데 PiS 지지를 받는 전임 안드레이 두다 대통령이 총리의 친유럽 법안에 모조리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런데 이번에도 대통령과 총리의 정당이 다른 동거 정부가 구성되면서 대통령이 투스크 총리의 정책에 계속 제동을 걸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폴란드의 유럽 내 위상을 결정짓는 선거에 트럼프 행정부가 개입했다. 지난 5월 27일 바르샤바에서 미국의 공화당 지지단체 보수정치행동회의(CPAC)가 열렸고, 크리스티 노엠 미 국토안보부 장관이 여기에 참석해 나브로츠키 후보를 적극 지지했다. 그는 친유럽적인 트샤스코프스키 후보를 사회주의자라고 규정하며 “탈선한 열차 같다”고 맹비난했다.
외교와 무관한 국토안보부 장관이 동맹국의 대선 집회에 참석해 특정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한 것은 전례가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승인 없이 이럴 수는 없다. 투스크 정부는 이런 결례를 불쾌하게 여겼지만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 없었다. 미국과의 동맹이 외교 정책의 기조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개입이 트럼프 취임 후 의도적으로 계속됐다.
유럽 도발한 밴스, 극우 정당 지지 발언 지난 2월 16일 뮌헨안보회의에서 J D 밴스 미국 부통령의 연설로 유럽의 극우 정당 지지는 본격화했다. 벤스 부통령은 작심한 듯이 “유럽의 최대 위협은 러시아도, 중국도 아닌 ‘내부’에서 온다”며 독일을 비롯한 일부 국가에서 극우 정당이 확산하는 혐오나 차별 발언에 대한 규제를 문제 삼았다. 뮌헨안보회의는 주요국 정책 결정자가 모여 국제사회가 직면한 안보 리스크를 논의하는 자리다. 따라서 ‘트럼프 2.0’의 안보 정책을 기대했던 유럽의 정책결정자들은 이 발언에 크게 당황했다. 회의의 성격에 맞지 않는 생뚱맞은 발언이었고 미국 내 지지자를 향한 목소리였다. 미 언론은 이 발언에 대해 “논쟁을 야기했다”고 표현했지만 독일의 제2공영방송(ZDF)은 이를 “유럽을 도발하다”로 규정했다.
당시 유럽 언론 상당수 사이에는 밴스의 발언으로 가치 공동체로서 서구는 끝나간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밴스가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를 일부러 만나지 않은 채 극우 독일대안당(AfD) 대표를 보란 듯이 만났음을 감안할 때, 대놓고 극우 정당을 지지한 것으로 비쳐서다.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도 여기에 가세했다. ‘생물학적인 독일인’(Biodeutsch)이라는 매우 인종적인 용어로 합법적인 이민자조차 독일에서 추방하자는 게 AfD의 요구다. 이에 독일 정부는 AfD를 극우 정치 그룹으로 분류해 연방헌법수호청의 감청 등을 가능하게 한다고 지난 5월 초 발표했다. 그러자 루비오는 이를 “위장된 전제정치”라며 강력 비판했다.
티모시 G. 애시 영국 옥스퍼드대 유럽사 교수는 지난달 28일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에서 마가는 유럽 극우정당 지지를 서구를 위한 투쟁으로 여긴다고 분석했다. 이슬람 이민을 너무 많이 수용해 서구의 가치를 훼손 중인 독일 등에 마가의 이념을 적극 확산하는 것을 임무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 주도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유하는 가치 공동체 서구를 만들어왔고 여기에서 유럽은 중요한 한 축을 구성했다. 그런데 80년 가까이 지속한 이런 가치 공동체가 트럼프를 대표로 하는 마가의 출현으로 점차 붕괴 중이다. 제레미 샤피로 유럽외교협회 연구실장도 “트럼프 행정부는 자신들과 이념이 흡사한 유럽의 여러 정당을 지지해 새로운 대서양 관계를 만들려 한다”고 진단했다. 이렇게 해야 단기적인 경제 이익에 치중하는 트럼프 행정부에 이득이라는 것이다.
EU 회원국 선거, 친유럽파 vs 반유럽파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게 내년과 2027년에 치러질 EU 회원국의 선거 결과다. 빅토르 오르반은 2010년부터 헝가리 총리로 재직 중이다. 헝가리는 반이민과 반이슬람 정책으로 EU와 대립각을 세워왔고, 그는 계속해서 트럼프의 열렬한 팬이다. 내년 봄 선거에서 자신을 ‘유럽의 트럼프’로 집중 부각하며 정권 유지에 사활을 걸 것이다.
2027년 5월 프랑스 대선에서 여론조사대로 극우 성향의 국민연합(RN)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그해 11월 폴란드 총선에서 PiS가 다시 총리 자리를 거머쥔다면 트럼프 행정부와 유사한 이념의 정당들이 정권을 운영하게 된다. 이 경우 유럽에서 친유럽적 세계화 지지 세력과 반유럽적 반세계화 세력이 더 격돌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일관되게 후자의 편에서 유럽의 이념적 동지들의 지원과 확대에 주력할 것이다. ‘트럼프 2.0’은 무역에서는 보호무역이지만 이념에서는 국제적이다. 자신과 유사한 이념을 통제하는 유럽 동맹국 비판에 열을 올린다. 앞으로 미국과 유럽 간에는 무역 분쟁뿐 아니라 극우정당 지지를 두고도 갈등이 더 깊어질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