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최근 한류의 성과는 볼수록 새삼스럽다. 생로병사를 겪는 유기체에 비긴다면, 한류의 나이는 서른 살에 가깝다. ‘사랑이 뭐길래’ 같은 TV 드라마가 1990년대 후반 중화권에서 인기를 얻으며 생겨난 표현이라는 게 중론이다. 한 세대, 30년간 성장하다 보니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없지 않았다. 10여 년 전 ‘강남스타일’의 벼락같은 성공이 그렇다. 하지만 지금 한류는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동시다발적이고 다채롭다.
차원이 다른 듯한 최근 한류 성과
한국인 문화 특성 덕이라는 분석
한류 지원책 세운다면 섬세하게
워낙 보도가 많이 됐지만 간추리면, 우선 ‘오징어 게임3’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 시즌 1, 시즌 2의 후광 효과가 품질 논란을 잠재운 결과라고 본다. 뉴욕타임스는 영화 ‘기생충’을 21세기 최고의 영화로 선정했다. 감독·배우 등 투표 참가 500여 명의 대표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매체가 뉴욕타임스다. ‘기생충’의 북미 흥행 기록을 갈아치운 애니메이션 ‘킹 오브 킹스’는 할리우드 영화와 견줘도 시비를 걸 수 없을 만큼 질적으로 뛰어나다고 한다(영화평론가 전찬일). 토니상 6관왕에 오른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나, 스포티파이를 강타한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물건’임을 알아챈 미국 문화산업이 기민하게 콘텐트 제작에 나선 결과로 싸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한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나. 대통령의 진단처럼 한국은 문화강국의 초입에 있나. 한국 문화 콘텐트의 인기는 언제까지 갈 것이며, 왜 인기 있나.
역시 뉴욕타임스 기사를 참조하자. 여러 한국 매체에서 소개한 대로, K컬처가 글로벌 주류 시장에서 편안해 보이지만(ensconced) 음식·패션·영화 분야의 문화 강국인 프랑스·이탈리아·일본처럼 되기에는 갈 길이 멀다고 했다.
한국의 평자들은 문화론적 분석을 내놓는다. 한국연구원 이영준 이사장은 “한류는 음식으로 치면 퓨전인데, 삶의 방식이나 멘탈리티는 한국 거고, 기교는 서양 거”라고 했다. 한자 문명이라는 고급문화에 젖줄을 대고 있어서 한국인들의 생각은 보편적인 데가 있고 윤리에 특히 민감한데, 서양 근대를 받아들여 100년을 문화적으로 소화한 결과가 지금 한류라는 것이다. 고급을 세련되게 담아내니 한류가 먹힌다는 것. 정신 자산이 강점이라니, 이렇게 본다면 한류는 금방 끝날 현상이 아니다.
수년간 한류와 K팝의 현장을 추적해 온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홍석경 교수는 한류의 경쟁력을 한국인들의 역량에서 찾는다. 수백 년에 걸친 문치(文治)의 결과일 텐데, 한국인들은 계엄이 벌어지면 헌법 책을 사보거나 국회 앞으로 뛰어갈 정도로 세상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런 한국인들은 흠결 있는 콘텐트에는 가차 없이 등을 돌린다. 그런 시청자들과 상대하다 보니 한류 수준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홍 교수 역시 한국인들의 역량을 중시하는 입장이니, 한류는 오래 간다고 본다.
한류가 더욱 번성하기를 바라는 데 이견 없는 우리 앞의 선택지는 두 극단 사이의 어디쯤일 것이다. 문화의 생로병사 현상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거나 뭔가 더 바람직한 방향을 위해 어떤 식으로든 개입하거나.
서울 논현동 청구빌딩 일대는 BTS의 성지다. BTS 소속사인 하이브가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시절 사옥으로 썼던 건물이고 BTS 멤버들도 이곳에서 기숙했다고 한다. 멤버들 단골이었던 근처 식당들 앞에서는 다양한 생김새의 외국인 K팝 순례자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청구빌딩 외벽은 기괴할 정도다. 다양한 문자의 길고 짧은 문장들로 빼꼼한 구석이 없을 정도다. 이름자거나 BTS에 대한 애정 고백일 것이다.
극한의 추위나 더위가 아니라면 언제나 서너 명이 빌딩 앞을 서성인다. 30도가 넘은 7일 오후 만난 21세의 덴마크 여성 라우라 스큐트(Laura Skjødt)도 그중 하나. K팝 그룹 에이티즈(ATEEZ) 콘서트 관람을 위해 한국을 처음 찾았다는 그녀는 10대 시절 BTS 열혈팬이었다고 했다. ‘너 자신을 표현하고 스스로를 사랑하라’는 메시지에 빠져들었다는 것. 하지만 “나이 들어 정상적(normal)이 되면서 더 이상 BTS 노래에서 과거와 같은 흥분은 느끼지 않는다”고 했다. “멤버 전원이 전역해 재결합하는 것은 엄청난 일”이라면서 “요즘은 다양한 음악을 듣는다”고 했다.
한 사람의 팬 안에서도 한류는 생로병사를 겪는다. 무언가를 하겠다면, 그런 점까지 헤아리는 섬세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