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의 ‘화석연료 부활’ 정책에 글로벌 완성차 업계의 반응이 엇갈리고 있다. 미국·일본의 자동차 기업은 전기차 출시 계획을 미루며 속도 조절에 나섰지만, 중국 전기차 업계는 해외 시장 공략의 기회로 보고 있다. 국내 자동차 업계는 하이브리드 모델로 전기차 수요 감소에 대응하겠다는 계획이다.
9일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외신에 따르면, 추이둥수(崔東樹) 중국승용차협회 사무총장은 지난 8일 트럼프 행정부의 전기차 보조금 폐지 정책에 대해 “중국의 자동차 수출이 향후 몇 년 동안 상당한 성장을 이룰 수 있게 됐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반(反)전기차’ 정책으로 반사이익을 볼 것이라는 자신감의 표현이다. 유럽과 동남아·중동·남미 등 제3시장에서 전기차 판매를 늘리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4일(현지시간) 최대 7500달러(약 1000만원)의 전기차 보조금을 폐지하는 감세 법안에 서명했는데, 100% 고율 관세로 미국 수출길이 막혀있는 중국산 전기차에는 영향이 없다.
한국 업체들은 상황이 다르다. 지난 상반기 현대차·기아의 미국 전기차 판매량은 4만4533대로 전년 동기(6만1883대) 대비 28% 줄었는데, 하반기에는 더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시장조사업체 워즈인텔리전스에 따르면, 현대차·기아의 상반기 미국 전기차 시장 점유율은 7.6%를 기록했다. 테슬라(42.5%)와 제너럴모터스(13.3%)에 이은 3위다. 3년간 2위 자리를 유지하다 이번에 3위로 내려앉았다
권용주 국민대 자동차운송디자인학과 교수는 “미국은 수입 전기차의 경우 리스용에 한해 보조금을 지급했는데, 현대차·기아가 주로 판매했던 리스 시장이 포화에 달한 것”이라며 “여기에 보조금 폐지까지 고려하면 단기적으로 미국 전기차 판매가 줄어들 수 있다”라고 말했다.
글로벌 완성차 업계는 트럼프 행정부 정책에 발맞춰 전동화 계획을 수정하고 있다. 토요타는 미국 켄터키주 조지타운 공장에서 계획하던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SUV) 생산을 2026년으로 미뤘고, 혼다는 미국 전기차 시장을 타깃으로 하는 대형 전기 SUV의 개발을 중단했다. 폭스바겐은 전기차 전환에 투자하기로 했던 1800억 유로(290조원) 가운데 600억 유로(약 97조원)를 내연기관 개발에 투입하기로 했다.
현대차그룹은 기존의 전동화 계획을 유지하되 하이브리드 모델로 단기적인 전기차 수요 감소에 대응한다는 전략이다. 호세 무뇨스 현대차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미국 오토모티브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전기차로의 전환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고 있다”라며 “하이브리드, 수소차까지 포괄하는 전동화 전략으로 소비자 수요에 발맞출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는 2030년까지 21종의 전기차와 14종의 하이브리드차를 출시해 각 모델을 아우르는 친환경차 ‘풀라인업(Full Line-up)’을 갖추겠다는 계획이다.
이항구 한국자동차연구원 자문위원은 “테슬라 등 고급차 브랜드를 사는 소비자에게는 보조금이 중요하지 않지만, 중급 모델은 수요가 줄어들 수 있다”라면서도 “향후 2만5000달러(약 3400만원) 이하의 보급형 모델이 출시되기 시작하면 전기차 시장이 내연기관만큼 커질 수 있기 때문에 여러 전기차 라인업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