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 소녀 ‘일라이’는 옆집 소년 ‘오스카’와 숲속에서 종종 만난다. 일라이는 처음 오스카에게 “난 너와 친구가 될 수 없어”라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며 점점 가까워지고, 서로를 향한 감정은 커진다. 일라이는 오스카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 애쓰지만, 그는 결국 인간의 피를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다.
연극 ‘렛미인’은 2004년 출간된 스웨덴 작가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2008년 개봉한 같은 제목의 스웨덴 영화로 국내 팬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2013년 스코틀랜드 국립극단에 의해 처음 연극으로 만들어졌다. 한국에서는 지난 2016년 초연했고 올해 9년 만에 재연 공연이 성사됐다. 지난 2020년에는 코로나19 여파로 예정된 공연이 취소됐었다.
‘렛미인’은 아픔을 가진 소년·소녀 간 애틋한 사랑이 중심축이다. ‘돼지 새끼’라 불리며 수시로 구타를 당하는 것은 물론, 엎드려서 흙까지 퍼먹어야 하는 외톨이 오스카에게 일라이는 유일한 친구다. 몇백년간 인간의 눈을 피해 인간 피를 먹고 살아온 일라이도 외롭긴 마찬가지다. 두 영혼은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며 사랑에 빠지지만 몇백년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불멸일 뱀파이어와 하루하루 나이를 먹어가는 인간의 사랑이 쉽게 진행될 리 없다.
연극 무대에선 이런 애틋한 감정을 대사와 더불어 다양한 장치로 표현했다. ‘렛미인’의 배우들은 몸을 많이 쓰는데 속삭이는 듯한 몸집은 말로 전하는 대사보다 더 많은 감정을 전한다. 지난 2016년 초연 당시 “무용극이라고 느껴질 만큼 안무가 많았다”라는 관람객의 리뷰가 있었는데, 재연도 다르지 않다.
연극 ‘렛미인’의 오리지널 연출자인 존 티파니는 최근 국내 언론과 화상 인터뷰에서 “캐릭터들은 안무를 통해 소통의 욕구를 표현한다”며 “특히 오스카의 경우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정서적으로 이해받지 못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안무를 통해 감정선을 드러낸다”고 소개했다. 일라이와 오스카가 주고받는 모스 부호도 둘만의 교감을 잘 보여주는 장치로 작용한다.
이 작품은 사랑 이야기이지만 호러물이자 스릴러다. 뱀파이어가 소재인 작품 답게 ‘피’는 극중 요소 요소마다 등장한다. 소름 끼칠 정도로 충격적인 장면들이 적지 않다. 눈밭 위로 빨간 피가 번지는 장면들은 매혹적이면서도 잔인한 이 작품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제작진조차도 이렇게 경고했다. “마지막 10분 장면은 어디서도 보지 못한 충격적인 장면이 나와, 나도 눈을 깜빡이지 못했다…임산부와 노약자는 관람을 절대 피하시기를 바란다.”(이지영 국내 협력 연출)
무대 장치도 인상적이다. 소품은 정글짐과 가로등 뿐이지만 무대를 가득 채운 자작나무 숲이 장관을 연출한다. 동시에 스산한 기운을 더했다.
이번 공연에선 배우 안승균과 천우진이 오스카역을, 권슬아와 백승연이 일라이 역을 맡았다. 안승균의 경우 초연에 이어 9년 만에 같은 역할을 연기한다. 권슬아는 2020년 당시 일라이 역에 캐스팅됐다가 공연 취소로 무대에 오르지 못했는데, 재차 오디션을 거쳐 일라이를 연기할 수 있게 됐다. 렛미인은 다음 달 16일까지 서울 중구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