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전기차·배터리 업체들이 글로벌 진출을 확대하며 한국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기존 중국 전기차 시장은 외국계 업체가 진입하기에 매우 폐쇄적인 구조였는데, 최근 ‘자국 위주 공급망’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으로 풀이된다.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정체) 속 실적 부진을 겪는 K배터리에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9일 배터리 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LG에너지솔루션이 중국 체리자동차의 자회사인 체리기차와 공급계약을 맺은 것을 두고 ‘철옹성’을 뚫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LG에너지솔루션은 내년 초부터 6년간 체리기차에 ‘46시리즈’ 원통형 배터리 총 8GWh(기가와트시)를 공급하기로 했다. 계약 금액은 1조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해당 배터리는 체리기차의 유럽 공장에 공급한다.
중국 전기차 내수 시장 성숙으로 완성차 업체들이 해외 진출을 노리며 나타난 변화로 해석된다. 중국 완성차 업체들이 유럽 시장을 공략하려면 중국산 배터리에 대한 관세와 공급망 규제, 특허 문제 등을 고려해야 한다. 체리기차는 중국 국영 업체로, 지난해 전체 판매량(240만대) 가운데 약 46%(110만대)를 수출했다.
업계는 중국 완성차 업체들의 수출이 늘수록 한국과 협력 사례도 증가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아직 중국 내에서 판매하는 전기차는 자국 배터리 탑재량이 압도적이지만, 해외 물량에서는 기회가 있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차세대 분야 기술력을 키우는 게 관건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최재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체리기차의 경우 중국 국영기업이 먼저 나서서 ‘한국과 손잡아도 된다’는 시그널을 보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라며 “로봇·도심항공교통(UAM) 같은 차세대 시장은 한·중 모두 이제 개발하는 단계인 만큼, 해당 분야에서 앞서면 K배터리 3사의 중국 공략 기회가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고객 다변화가 필요한 국내 배터리 소재 업체들도 유럽 생산기지를 활용해 중국 업체 공략을 강화하고 있다. 관세 장벽으로 유럽 현지화가 필요한 중국 배터리사들은 현지 생산에서 앞서 있는 K배터리 밸류체인에 눈을 돌리고 있어,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는 분석이다.
솔루스첨단소재는 지난달 중국 CATL과 전지박(동박) 공급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헝가리 공장에서 생산한 동박을 CATL 유럽 공장에 공급할 계획이다. CATL은 올해 안에 헝가리에 연산 100GWh의 대규모 공장을 가동한다. 솔루스첨단소재는 “세계적 수준의 품질, 현지 공급과 발 빠른 대응 등의 경쟁력을 입증한 것”이라고 했다. 같은 동박 업체인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도 지난달 말 유럽 내 첫 생산기지인 스페인 공장을 착공했다. 2028년 상업 생산 예정으로, 연산 3만톤 규모다.
다만 중국 업체들의 한국 공략도 증가하는 점은 숙제다. 올해 초 한국 법인을 세운 CATL은 향후 현대차, 기아 등 국내 기업과 협력을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기아는 전기 목적기반차량(PBV)인 ‘PV5’에 CATL이 만든 삼원계 배터리를 탑재했다. K배터리 3사도 가격 경쟁력 때문에 중국 소재사를 택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결국 국내 업체들이 ‘안방’은 기술력으로 지키고, 중국 공략은 안정적인 해외 생산 체계를 바탕으로 강화하는 전략을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