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정부의 정책 밑그림을 그리는 국정기획위원회가 9일 반도체‧자동차‧배터리‧조선 등 산업별 주요 기업 9곳과 만나 ‘관세 전쟁’ 대응 전략과 각 산업 경쟁력 확보 방안을 논의했다. 미국 트럼프 관세와 글로벌 공급망 재편, 통상 마찰이 가시화되는 가운데 정부와 업계가 머리를 맞대고 민관 공동 대응 방안을 모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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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기획위, 대기업 9곳과 비공개 간담회
국정위 경제2분과는 9일 오후 약 1시간 가량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에서 반도체·배터리·자동차·조선·방산·철강·석유화학·에너지 등 주요 업종 기업과 ‘통상·경제안보 관련 간담회’를 열었다.
주제는 통상, 경제 안보, 수출 전략, 산업 경쟁력 강화를 아울러 업계의 생생한 애로 사항을 듣는데 집중됐다. 이 자리에는 경제2분과 위성곤 기획위원 등 국정기획위원회 위원들과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기아, LG에너지솔루션, 포스코, 한화에어로스페이스, HD현대중공업, 두산에너빌리티, 롯데지주 등 주요 대기업 9곳의 임원들이 참석했다. 이들은 ‘노타이’ 드레스코드에 맞춰 격식을 덜고 비교적 허심탄회하게 발언에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위성곤 국정기획위원회 경제2분과 위원은 “정부와 경제계가 원팀이 되어 당면한 통상 파고를 극복하는 것이 경제안보의 핵심”이라며 “기업들도 중장기적인 경쟁력 강화 및 체질 개선에 적극 노력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번 회의에서는 미국발 고율 관세가 현실화되며 수출 장벽이 높아지고 있다는 우려와 함께 반도체·배터리·자동차 등 핵심 산업에 대한 세제·금융 지원 확대 요구가 공통적으로 제기됐다. 대표적으로는 ‘한국판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도입이 도마 위에 올랐다. 기업이 투자한 금액에 대해 세액공제분을 현금으로 직접 받는 직접 환급제를 배터리업계는 요구해왔다. 현재 조세특례제한법에 따라 반도체·배터리 등의 시설 투자에는 최대 15%의 세액공제가 가능하지만, 이는 흑자 기업에 한정된 법인세 감면 방식이라 적자 연속인 현재 배터리 업계에는 실효성이 낮다는 주장이다.
“관세 폭탄으로 대미 수출이 꺾이면 타격이 크다”는 우려가 높은 자동차 업계에서도 세제 혜택 및 정책 지원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3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보호무역주의 기조에 호응해 미국 조지아주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 등에 약 31조원(210억달러) 규모의 현지 투자 계획을 발표했으나 그 효과를 체감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7일에도 자동차·철강 등 품목관세는 국가별 상호관세 협상과 별개로 부과하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했다.
최근 수출 호황을 맞은 조선·방산업계는 글로벌 수주 확대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 정부 차원의 협력 체계가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반면 석유화학과 철강업계는 업황 부진에 더해 미국의 고율 관세 부과까지 겹치며 이중고를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원자력 업계에서는 국내 원전 생태계 유지를 위해 계획된 원전을 차질 없이 추진하고 해외 수출 확대를 위한 정부 지원 필요성을 강조했다. 재생에너지 확산을 위한 인센티브와 공급 과잉 업종들에 대한 사업재편 등 다양한 정책 과제도 제안됐다. ‘반도체 특별법’과 반도체 소부장 역량 강화 등도 거론됐다고 한다.
위 위원은 이 같은 요청에 “기업이 활력을 되찾아야 좋은 일자리가 생기고 우리 경제에 숨통이 트인다”며 “새 정부의 통상·경제안보 정책 방향을 세심하게 마련하겠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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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 구조도 문제…“G20 중 한국 수출 의존도 1위”
이처럼 일선 기업 현장의 통상 불안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한국 경제의 수출 구조 자체가 외부 충격에 취약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이날 발표한 ‘G20 상품 수출 의존도 추이와 시사점’ 보고서에서 한국의 상품 수출 의존도가 37.6%로 G20 국가 중 가장 높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이종명 대한상의 산업혁신본부장은 “제품 수출에 기댄 성장만으로는 한계에 부딪힐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며 “K-푸드·K-컬처의 산업화, 지식재산권 수출 전략화, 전략적 해외투자를 위한 제도 개편 등 다각적 노력을 통한 소프트 머니 창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