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사진)은 호남성의 중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인색했으며, 소출을 늘리고자 아들을 매질하고, 일꾼을 늘리려고 일찍 며느리를 들였다. 그런 생활 속에서 그는 자살도 생각했다.
그는 창에 불빛을 가리고 『삼국지』 등의 군담 소설을 탐독했다. 성격은 거칠어졌고, 비가 오면 옷을 벗고 마당에 나가 비를 맞으며 “지금 내 동포 7할이 비를 맞고 있다”고 자책했다.
신해혁명(1911)을 체험하고, 항일 투쟁과 국공 내전을 거친 모택동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주석에 취임(1949)하자 곧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스탈린으로부터 한국전쟁을 지원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고금의 병서(兵書)에 밝은 그는 스탈린의 요청이야말로 차도살인(借刀殺人)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실전 경험은 풍부했다.
내란과 항일전에서 노획한 무기로 군수(軍需)를 해결할 수 있었다. 중공군에 배속된 조선인 출신 2개 사단을 참전시키면서 항미원조(抗美援朝)라는 명분으로 침략을 호도할 수도 있었다.
신생 국가로서 군사적 초강대국인 미국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모택동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확전될 경우에 만주의 공업 시설이 위험하지만, 차제에 소련으로부터 공업 기술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유혹적이었다.
계산 끝에 모택동은 10월에 파병했다. 병력 규모는 지상군 290만5000명이었다. 중공의 참전은 스스로의 계산과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예상한 바이지만 사망 14만 명, 부상 22만 명, 행방불명·포로 2만9000명은 너무 아팠다. 그러나 휴전회담장에서 미국과 마주 앉은 중공은 국제무대에 부상하면서 마냥 즐거워하며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휴전 회담을 2년 동안 끌었다. “후회하지 않는 전쟁은 없다”지만, 한국전쟁과 관련된 국가 가운데 모택동만이 후회하지 않았다. 자식을 잃으면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