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게임업계에서 화제가 된 일화. 정부가 주관하는 대규모 공모전에서 ‘서브컬쳐(하위문화)’ 장르 게임을 출품한 회사 대표에게 당시 심사위원이 했던 질문이다. 서브컬처 게임은 특정 팬덤을 타깃으로 만드는 장르다. 본산지가 일본인만큼, 일본 애니메이션 풍 캐릭터들이 대거 등장한다. 장르의 문법이 그렇고, 그래야만 흥행한다. 그런데 심사위원이 당시 글로벌 게임업계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던 장르에 대한 기초 지식조차 없이 ‘왜색’ 운운한 것이다. 업계에선 “그럼 중세 배경 판타지 게임이 서구풍인 것도 문제냐”는 자조 섞인 반박이 한동안 회자됐다.
공모전 등 정부 사업 심사위원들의 현업에 대한 이해 부족 문제는 비단 게임업계 만의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없던 기술로 혁신적 서비스를 만드는 스타트업계에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현업 경험이 풍부한 전문가 집단 대신, 학계 관련 분야 교수, 담당 공무원 위주로 심사위원 구성이 되는 경우가 많아서다. 인공지능(AI) 관련 딥테크 스타트업 한 창업자는 “AI, 그래픽처리장치(GPU)가 없던 시절 박사 학위를 취득한 분들이 심사하는 경우가 많다”며 “최신 기술을 적용해 입찰에 참여했는데, 기존 기술보다 운영 경험이 부족해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만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최신 기술인데 어떻게 운영 경험이 많을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사실 기술 개발 속도전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빠르게 진화하는 기술의 디테일을 정부와 학계에서 제대로 알고 따라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AI 같은 첨단 기술 분야는 더더욱 그렇다. 더 큰 문제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심사위원들이 구조적으로 안정적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최소한 실패하지 않을 거란 보장이 되는 대기업 위주 선택을 한다는 것. 국내 벤처캐피털 한 심사역은 “현재 구조상으론 ‘듣보잡’으로 보이는 스타트업을 택하는 모험을 할 이유가 없다”며 “대기업 외엔 국내 AI 산업계 스타트업이 설 자리가 너무 없다”고 지적했다.
최근 정부는 AI 3대 강국을 위한 100조원 규모 투자를 준비 중이다. 이를 바라보는 스타트업계 시선엔 기대만큼 체념도 많다. 심사 과정이 이번에도 안정성, 대기업 위주로 진행될 거라는 경험칙에 따른 것이다. 물론 정부 사업에 안정성은 중요하다. 세금이 투입되는 만큼 엄격한 검증도 필수다. 하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새 기술이 쏟아지는 분야에서까지 안정성이 제1 심사기준이 된다면, 혁신 스타트업들은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 적어도 기술 분야에서만큼은 안정성과 혁신성, 조화로운 심사 기준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