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가 지금의 모습이 된 데에는 존 니콜스의 공이 큽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평가다. 황은 니콜스 관련 질문을 받은 다른 인터뷰에서는 표정이 굳어진 뒤 바로 화제를 바꿔버렸다.
니콜스는 컴퓨터 비디오 게임에 쓰여온 엔비디아의 그래픽처리장치(GPU)가 범용 수퍼컴퓨터로 변환될 수 있게끔 했다. GPU는 정보 처리 역량은 뛰어났지만 그전까지는 다룰 수 있는 정보가 이미지에 국한됐다. GPU를 범용 수퍼컴퓨터로 변환한 것이 니콜스 주도로 개발돼 2006년에 공개된 소프트웨어 플랫폼 쿠다(Computer Unified Device Architecture, CUDA)이다.
엔비디아의 소프트웨어 책임자는 쿠다를 이렇게 설명한다. “한쪽에 비디오게임 카드가 있어요. 그 위에 스위치를 달아요. 그 스위치를 켜 카드를 뒤집으면, 갑자기 그 카드가 수퍼컴퓨터가 되는 거죠.”
흑색종 진단에도 주 72시간 근무
존 니콜스, 엔비디아 기반 만들어
기술부터 성공 후 시장·고객 확보
행동주의 펀드 공격 꿋꿋히 버텨
수월성 교육 덕에 AI 역량 강화
한국, 천재 대신 중간층만 육성
GPU를 수퍼컴퓨터로 만든 쿠다
니콜스는 53세 때인 2003년 엔비디아에 합류했다. 출근 후 2주 만에 악성 흑색종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치료받는 동안에도 주 72시간씩 일했다. 그는 “쿠다가 궁극적으로 세상에 미칠 영향만큼 큰 발명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완화됐던 흑색종이 재발했고, 그는 쿠다가 사업적으로 성과를 내기 전인 2011년에 타계했다. 니콜스가 거명되자 젠슨 황의 표정이 굳어진 이유다. 엔비디아는 그를 기리기 위해 일리노이 대학교 어배너-샴페인 캠퍼스에 장학기금을 출연했다.
젠슨 황의 공식 전기인 『엔비디아 젠슨 황, 생각하는 기계』를 번역하는 동안, 필자는 직·간접적으로 두 가지 화두에 집중했다. “엔비디아의 성공 요인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
” “엔비디아 같은 회사가 (한국에) 생기고 30
%
가 국민 지분이라면 세금에 그렇게 의지하지 않아도 된다.” 이를 합치면, “엔비디아가 성공한 핵심 요인을 하나 뽑아내 한국에 이식하면, 그에 필적할 초우량기업을 키워낼 수 있을까
?
”
답을 정리하면서 처음 떠오른 인물이 니콜스였다. 이어 쿠다를 통한 돌파를 위해 니콜스와 머리를 맞대고 몰두한 교수 출신을 비롯한 여러 엔지니어로 생각이 이어졌다. 이들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엔비디아도 없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엔지니어들
여기서 잠시 쿠다의 하드웨어 기반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쿠다는 엔비디아 GPU에서만 돌아간다. 쿠다와 함께 엔비디아 GPU는 ‘쿠다 코어’로 분할·설계됐다. 병렬형 컴퓨팅을 고도화하기 위해서였다. 인텔이 수십 년간 장악해온 중앙처리장치(CPU)는 직렬형이다. 택배 트럭 한 대가 일일이 배송하는 방식이 직렬형이라면, 오토바이 기사 수십 명이 우편물을 나눠서 동시에 나르는 방식이 병렬형이다. 후자가 작업을 훨씬 더 빠르게 처리한다. 쿠다 이전, 엔비디아는 이미 1998년 병렬형 컴퓨팅을 GPU에 일부 구현했다. 병렬형 컴퓨팅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포기된 지 오래된 때였다. 니콜스를 필두로 병렬형 컴퓨팅 완성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긴 엔지니어들이 속속 엔비디아에 집결한 배경이다.
한국은 반도체 중 메모리에 주력해왔고, 엔비디아의 영역인 마이크로프로세서에서는 크게 뒤처져 있다. 추격과 혁신은 모두 두뇌에서 나오는데, 한국의 반도체 전문 인력 수는 미국은 물론이고 대만에도 미치지 못한다. 매년 배출되는 반도체 석·박사 수에서도 대만에 밀린다. 니콜스와 그의 동료들처럼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놓는 엔지니어들이 지금 한국에서 다수 나올 수 있을까
?
이대로라면 앞으로는 불가능해진다.
엔비디아의 성공에는 외부 요인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제프리 힌턴 교수의 연구팀이 이룬 인공지능(AI) 역량 강화다. 힌턴 연구팀이 정체돼 있던 AI를 일깨우자, 이후 AI의 지능이 여러 방면에서 놀라운 속도로 계발됐다. 이는 오픈AI 설립으로 이어졌고, 쿠다로 준비하고 있던 엔비디아는 2016년 오픈AI에 수퍼컴퓨터 DGX-1을 공급한다. 이후 챗GPT 등 생성형 AI는 엔비디아의 칩과 나란히 고속 성장한다.
힌턴 연구팀은 두 천재가 힌턴의 제자로 합류하면서 날아올랐다. 구 소련 출신인 알렉스 크리제브스키와 일리야 수츠케버였다. 이들이 없었다면 AI의 상용화가 몇 년 뒤로 늦어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행동주의 투자 펀드에 공격받던 엔비디아는 쿠다를 포기했을 수 있다.
요컨대 두 천재가 없었다면 현재의 엔비디아도 없었을지 모른다.(AI는 엔비디아를 논외로 하더라도 중요하다.) AI 전문 인력을 배출하는 토양은 행렬과 벡터 등 수학을 중심으로 한 수월성(秀越性) 교육이다. 그러나 한국은 2018년에 행렬·벡터를 고등학교 수학 수업에서 제외했다. 더구나 대학 입시를 정점으로 하는 한국 중등교육은 수월성보다는 시험 문제의 수월함에 더 치중하고 있다. 아울러 서울대를 10개 더 만든다는 계획은 효과를 거두더라도 수월성을 높이기보다는 중간층을 두텁게 한다. 딥시크를 만들어낸 량원펑을 배출한 중국 항저우의 저장대학만 해도 연간 예산이 서울대의 3.5배나 된다.
성공 사례를 분석할 때 단순화는 경계해야 한다. 성공 사례는 대부분 여러 요인이 두루 어우러진 결과다. 어느 하나가 결여된 경우 성과에서 멀어진다. 이는 식물이 필수 요소 중 하나만 없어도 자라지 못한다는 ‘리비히의 법칙’에 비유할 수 있다. 불가결한 또 다른 요인은 엔지니어들의 미친 듯한 몰입이다. 니콜스를 포함해 쿠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엔비디아의 엔지니어들은 양과 질 두 측면 모두에서 일에 푹 빠져서 지냈다.
“최고의 아이디어는 금요일 밤 떠올라” 발견과 발명에서 몰입의 힘은 숱한 사례를 통해 증명됐다. 벤젠의 분자 구조를 규명한 화학자 케쿨레는 꿈에서 계시를 보았고, 세계 최초로 청색 발광다이오드(LED)를 개발한 나카무라 슈지는 학회에서 들은 구절에서 결정적 힌트를 얻었다. 영감의 필요조건은 시간 투입이다. 한 가지 과제를 붙들고 긴 시간 집중해야 영감이 떠오른다.
엔비디아의 엔지니어들도 몰입의 보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발상을 얻었다. 그런 경험을 이 회사의 하드웨어 엔지니어링 디렉터 아르준 프라부는 이렇게 들려줬다. “가장 좋은 아이디어는 금요일 밤에 떠올라요. 말 그대로 꿈속에서 그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죠.”
한국은 어떤가. 주 52시간 근무의 탄력 적용이 논의만 될 뿐이다. 격변하는 기술 지형에서 세계적으로 시간과 몰입의 경쟁이 치러지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오히려 주 4.5일 근무제가 검토되고 있다.
편집광이자 워커홀릭, 젠슨 황 엔비디아의 중심에는 젠슨 황이 있다. 이 글에서 그를 이렇게 뒤에 배치한 것은 그의 역할이 덜 중요했기 때문이 아니다. 간과되어 온 다른 인물과 요인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에서 그와 같은 최고경영자(CEO)가 나올 수 있을까
?
젠슨 황의 강점 또한 한둘이 아니다. 20대 때부터 리더십으로 인정받았고, 일을 즐기는 워커홀릭이며, 늘 새로운 모험을 찾는다. 그가 노리는 것은 고만고만한 규모가 아니라 엄청난 신규 시장이다. 그는 이를 ‘제로-빌리언 달러 시장’이라고 표현한다. 그런 새 시장을 남보다 앞서 포착·선점하기 위해 정보통신(IT) 업계 리더 중 누구보다도 많이 사내외 사람들과 소통한다. 학습 역량도 탁월하다. 그래서 첨단 기술 동향을 바로 이해한다. 핵심 과제를 잡은 뒤에는 무섭게 파고들어 그 분야 최고수 수준이 된다.
엔비디아는 인텔을 몰아내고 IT 산업의 권좌를 차지했다. 인텔의 전성기를 이끈 경영자 앤디 그로브는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고 역설했다. 그로브의 ‘편집광’은 변화의 단초를 ‘적기’에 파악해 대응하는 기업가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젠슨 황은 ‘조기’의 편집광이다.
혁신 엔지니어 채용해 전권 부여 편집광 젠슨 황은 늘 안테나를 높이 세웠다. 세계 최초이자 의미가 큰 혁신을 꿈꾸는 사내외 엔지니어들의 의견을 수신했다. 병렬형 컴퓨팅을 필생의 목표로 잡은 두뇌들이 그에게 연락하고 제안했다. 그는 그들을 채용하고 발탁했으며, 조직 구성과 운영에 대해 전권을 부여했다.
그만의 특별한 접근은 시장을 먼저 보고 기술을 개발하는 순서가 아니라, 기술을 우선 성공시킨 다음 고객과 시장을 찾아 나서는 수순을 취하는 것이다. 그래서 쿠다 개발과 DGX-1 공급 사이에는 10년의 큰 시차가 있었다. 행동주의 투자 펀드의 공세를 방어하면서 이 공백을 꿋꿋하게 버틴 뚝심도 그의 강점이다.
젠슨 황은 ‘광속 경영’으로도 알려졌다. 여기서 ‘광속’은 가능한 최고 속도나 목표를 뜻한다. 그는 ‘광속’을 기준으로 변수를 바꿔가면서 현 단계에서 성취할 수 있는 목표를 잡는다. 엔비디아는 앞으로 상당 기간 한국에서 나올 수 없다. 그러나 한국을 엔비디아라는 ‘광속’에 비추어 돌아보는 작업에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