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K팝 위기론이 거셌다. 업계가 앓는 소리를 했다. 지난해 K팝 음반 판매량이 10년 만에 처음으로 감소하며 성장세가 꺾인 탓이다. 2023년 사상 최초로 1억장을 돌파했던 K팝 음반 판매량은 지난해 9300만장으로 약 19% 감소했다. 아무래도 BTS의 공백이 컸다. K팝 시장이 연간 12조7000억원 규모로 급성장했지만, 아직 글로벌 음악 시장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친다는 현실적 한계도 있었다. 그러나 최근 분위기는 딴판이다.
8만 관객 모으며 새 월드투어
솔로 성과가 팀 전체 성과 넘어
셀럽에서 실력파 아티스트로
복귀 BTS와 K팝 새 챕터 기대
우선 BTS가 돌아왔다. 멤버 전원이 군 복무를 마치고 내년 봄 완전체 활동을 예고하자 전 세계가 들썩이고 있다. 여기에 넷플릭스 글로벌 1위에 오른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있다. K팝 아이돌을 소재로 한 최초의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으로, 재미 교포인 매기 강 감독이 매력적인 K팝 넘버들에 한국 문화 코드를 잘 버무렸다. OST도 대박이 났다. 발매 직후 전 곡이 스포티파이 1위부터 줄 세우기를 하더니, 빌보드 핫100(싱글 메인 차트)에 7곡을 올렸다(앨범차트는 3위).
9일 현재 빌보드 핫100에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수록곡 7곡을 비롯해 블랙핑크 로제의 ‘아파트’와 하이브의 미국 현지화 걸그룹 캣츠아이의 ‘가브리엘라’ ‘날리’ 등 총 10곡의 K팝이 올라왔다. 로제가 피처링한 미국 싱어송라이터 알렉스 워렌의 신곡 ‘온 마이 마인드’도 첫 진입했다.
최근 만난 작곡가 김형석씨는 “우리에게 BTS와 블랙핑크가 있다면 그저 그룹 두 개가 있는 것이 아니라 BTS 멤버 7명, 블랙핑크의 4명이라는 슈퍼스타가 있다는 얘기”라고 강조했다. “두 그룹을 잇는 빅 플레이어가 잘 안 보여 K팝 위기를 우려하는 이들이 많다”는 지적에 대한 답이었다.
블랙핑크는 BTS가 군백기로 주춤하는 사이 여러 성과를 냈다. 로제의 ‘아파트’는 빌보드 핫100에서 K팝 걸그룹 최고 순위인 3위를 기록했다. 이후 차트 붙박이가 돼 매주 K팝 최장 진입 기록을 경신 중이다(현재 37주). 제니의 앨범 ‘루비’는 해외 음악전문 매거진들의 호평을 받았다. 롤링스톤과 빌보드, 영국 NME가 ‘2025년 올해의 앨범’의 하나로 꼽았다. K팝 최초의 일이다.
이런 성과는 지난 2023년, 팀 활동은 YG에서, 솔로 활동은 자기 기획사에서 ‘따로 또같이’ 선언 이후 나온 것이라 더욱 의미가 있다. 2년간 YG를 떠나 홀로서기를 하는 동안 멤버들은 성장했고, 그룹으로 활동할 때보다 더 큰 존재감과 파괴력을 갖췄다. 다양한 음악 스타일에, 세계적 음악가들과 네트워크도 과시했다. 로제는 히트곡 ‘아파트’가 수록된 앨범 ‘로지’에서 전곡 작사·작곡에 참여하며 싱어송라이터의 면모를 선보였다. ‘루비’를 공동 프로듀싱한 제니는 탁월한 스타성과 탄탄한 음악성을 겸비한 솔로 아티스트로 재평가받고 있다. 해외 인기가 압도적인 리사는 한장의 솔로 앨범, 다섯 장의 싱글을 냈다. 지수는 연기자로 왕성하게 변신 중이다. 솔로 활동으로 팀의 성취를 넘어서고 더이상 K팝 하위장르에 묶이지 않는 팝스타로 우뚝 선 모습이라 앞으로 그간 K팝이 도달하지 못한 유수한 시상식을 누빌 가능성도 점쳐진다.
블랙핑크는 여러 가지로 BTS와 비교된다. 국내파 ‘흙수저’ 아이돌의 언더독 신화로 21세기 청춘의 아이콘이 된 BTS와 달리 블랙핑크는 유복한 가정 출신의 해외파, 세련된 매너의 패션 아이콘, 셀럽 이미지가 강했다. BTS가 선한 영향력의 상징이라면 블랙핑크는 워너비 스타였다. 빌보드 핫100 1위 8곡, 빌보드 뮤직어워드 수상 12회란 BTS의 대기록에는 못 미치지만, 유튜브 구독자 수는 블랙핑크가 9720만명으로 BTS(8090만명)를 앞선다. 가수로는 구독자 수 세계 1위다(테일러 스위프트는 6120만명). 10억 뷰 이상 유튜브 영상은 블랙핑크와 BTS 모두 8개로 똑같지만, 블랙핑크는 그중 2개가 20억 뷰를 넘겼다. 가수 본업을 넘어 연기, 패션 아이콘, 셀럽 이미지에 실력파 아티스트 면모까지 갖춰 전방위적 매력 자산으로 K팝 아이돌의 가능성을 날로 확장 중이다.
블랙핑크는 지난 주말 경기도 고양에서 새 월드 투어 ‘데드라인’의 첫 무대를 열었다. 솔로 활동 이후 함께 뭉친 첫 자리라 7만8000 관객이 환호했다. 블랙핑크는 2022~2023년 월드 투어 ‘본 핑크’ 때 3억3000만 달러(4500억원)를 벌어들여 단일 공연 K팝 최고 수익 기록을 세웠다. 걸그룹으로는 세계 최고 기록이다. 2019년 스파이스 걸스의 7820만 달러(1071억원)를 가뿐히 넘겼다. 이번 투어는 지난번보다 공연장 규모를 키운 첫 ‘스타디움 투어’라 최종 수익에도 관심이 쏠린다.
블랙핑크가 블랙핑크를 넘어섰다. 여기에 돌아온 BTS까지 가세하면, K팝은 또 다른 챕터를 써 내려 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