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의 국방비와 주한미군 주둔을 위한 방위비 분담금의 대거 인상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트럼프는 8일(현지시간) 각료 회의에서 “한국은 많은 돈을 벌고 있고 아주 잘하고 있다”며 “그들은 군사비로 매우 적은 금액을 지불했다. (미국은 한국에) 무상으로 군사 지원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가 연간 100억 달러(약 13조7600억원)의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을 부담해야 한다는 취지로 압박했다. 트럼프가 이재명 대통령에게 다음달 1일부터 상호관세(25
%
)를 부과하겠다는 서한을 발송한 다음 날 방위비 증액을 주문하며 두 가지를 일괄 타결하겠다는 ‘원스톱 쇼핑’에 나선 것이다.
미국의 여건상 자국의 국방비 감축을 시도하려는 입장엔 이해할 부분이 없지 않다. 하지만 한국은 옛 소련의 사회주의 확장에 맞서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최전선에서 큰 희생을 치렀다. 이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부분이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이 미국 본토를 타격할 정도로 고도화하고 있고, 중국·러시아와 인접한 상황을 감안하면 한국의 지정학적 가치는 오히려 더 중요해졌다. 그럼에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이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의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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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올리기로 했으니 한국도 따르라는 식의 일방적 압박은 유감스럽다.
특히 한·미가 내년 1조5192억원으로 확정한 기존 합의를 대통령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미국이 백지화하려는 건 국가 간의 신뢰를 훼손하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당장 외교부는 어제 “(지난해 10월 서명한) 기존 합의를 준수하며 충실히 이행해 나간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혹시 미국이 한국 국방비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통해 자국 산업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것이라면 안보를 비즈니스에 활용하려 한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트럼프는 1기 때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의 5배 인상을 요구하며 군사 위성의 한반도 상공 비행을 비용에 포함하는 등 ‘작전 지원비’를 제시한 적이 있다. 당시 마땅한 인상 명분이 없자 억지로 항목을 만든 것이다. 트럼프가 2만8500명 안팎인 주한미군의 숫자를 4만5000명이라 부풀리는 것도 계산된 발언일 수 있다.
트럼프가 언급한 연 100억 달러는 올해 방위비 분담금(1조4301억원)의 9배가 넘는다. 미국이 억지스러운 항목을 또 제시할 가능성도 있다. 미국을 방문했던 위성락 안보실장이 어제 “국제적인 흐름에 따를 수도 있다”고 했듯이 한·미 동맹이나 국제 정세를 고려해 국방비나 주한미군 주둔비 인상이 불가피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크게 불러놓고 깎는 식의 흥정에 끌려가선 안 된다. 정부는 철저한 검증을 통해 납득할 수 있는 미국의 주장을 선별적으로 수용하되, 미국의 요구를 관세 협상 등과 연관시키는 방식으로 우리 국익을 최대한 지켜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