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내리쬐는 무더운 여름, 13살 소년 기준(이재준)과 그의 엄마가 차를 타고 어디론가 향한다. 이들의 목적지는 개발을 앞둔 지방의 한 소도시. 농어촌 특별전형과 신도시 입주에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해 서울을 떠나는 길이다.
기준의 눈엔 불만이 가득하다. 짐을 풀고, 전학 온 학교를 둘러보자 그 마음은 더 커진다. 학교에선 아디다스 운동화를 도둑맞았고, 또래들도 어딘가 촌스럽게 느껴진다.
그런 기준이 마음을 여는 대상이 있다. 또래들이 기피하는 중학생 형 영문(최현진), 그의 동생 영준(최우록)이다. 둘이 살며 돈과 물건을 훔치고, 폭력을 일삼는 형제는 동네의 ‘골칫거리’다. 엄마는 3년 전에 죽었고 아빠는 누군지 모른다. 그럼에도 기준은 힘으로 우위를 점하는 영문이 멋지게 느껴지고, 영문은 꺼림칙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자신을 따르는 기준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지난 9일 개봉한 독립영화계 기대작 ‘여름이 지나가면’은 이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카메라는 아이들을 담았지만, 관객은 자연히 어른들의 세계를 돌아보게 된다.
영화는 장병기(39) 감독의 첫 장편데뷔작으로, 지난해 제50회 서울독립영화제 넥스트링크상, 제24회 전북독립영화제 대상을 받으며 국내 영화제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지난달 26일, 장 감독을 중앙일보에서 만났다. 그는 따로 영화 교육기관에 재학한 적 없는 ‘현장형’ 인재. “2014년에 국비지원프로그램으로 영상을 배웠고, 영화하던 친구한테 부탁해 현장을 나가기 시작했죠. ‘수성못’(2017) 등에 연출부, 제작부로 참여하며 영화를 배웠어요.”
장 감독은 첫 단편 ‘맥북이면 다 되지요’(2017)로 제15회 광화문국제단편영화제 국내경쟁 대상을 수상하고,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이동진 평론가의 극찬을 받으며 영화계 샛별로 떠올랐다. 뒤이어 만든 두 단편 ‘할머니의 외출’(2019), ‘미스터장’(2021)을 통해 누구나 마주쳤을 일상을 밀도 있게 구현하고, 그 속의 사회문제를 건져 올리는 특기를 입증했다.
감독이 이번 영화를 통해 고찰한 것은 청소년기. 그중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할 나이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는 이 나이를 “어른들 눈에는 하염없이 어린 아이로 보이지만 자신의 판단을 오롯이 할 수 있는 시기”라며 “하면 안 된다고 배운 것도 해보고, 비밀과 거짓말이 늘어나는 때”라고 봤다.
이어 그는 “어렸을 적 나의 반항기는 기준의 방식에 더 가까웠다. 영화를 하며 (평범치 않게) 지내는 지금은 오히려 영문에게 감정이입이 된다”고 전했다.
Q : ‘여름이 지나가면’ 속 아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언제든 돌아갈 보호자의 품이 있는 기준과 보호자 없이 비행으로 생계를 이어야 하는 영문과 영준 형제가 양극단에 서 있다.
A : “형제가 저지르는 비행은 기준에게 동경의 대상, 특별한 놀이의 일환이다. 영문과 영준에겐 다른 의미다. 보통의 또래는 보호자가 주는 사랑 또는 미움을 받으며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형제에겐 그럴 기회가 부족했다. 그들의 입장에선 화를 내거나 동정하는 타인의 반응을 지켜보며 앞으로 취할 행동을 결정했을 것이다. 그 방향이 늘 윤리적으로 옳은 쪽은 아닐 수 있다.”
Q : 작품의 배경이 지방의 소도시였던 이유는.
A : “부산에서 청소년기를 났다. 영상을 배우러 서울에 잠시 올라왔다가 다시 대구로 들어와 지금까지 대구에서 지내고 있다. 이야기 곳곳에 지방에서 자란 내 경험을 많이 반영했다.
Q : 마음에 남는 장면이 있나.
A : “프리프로덕션 때부터 결말을 정해놨었다. 영문이가 동생 영준에게 ‘다시는 축구하자고 말하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장면이다. 형제에게 축구란 사람들과 편견 없이 함께할 수 있던 마지막 일상의 끈이다. 상처받은 형제가 그 끈을 스스로 놓는 순간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제목 속 ‘여름’은 영문과 영준의 여름이라고 생각한다. 여름이 지나가면, 형제는 예전 같은 일상을 살기는 어려울 것이다.”
Q : 청소년들이 주인공이지만 따뜻한 결말은 아니다.
A : “고약한 취향이 있다. 주인공들이 각자의 상처를 묻어두고 사는 결말을 좋아한다. 레퍼런스 삼진 않았지만, ‘히든’(2005), ‘해피엔드’(2017) 등을 만든 미하엘 하네케 감독을 이 영화를 만들 때부터 지금까지도 좋아한다. 그 감독도 그런 느낌의 결말을 쓰곤 한다.”
Q : 앞으로 계획 중인 작품이 있다면.
A :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내 필모그래피에선 처음일 것이다. 둘 중 하나가 더 사랑해서 기울어져 있는 연인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이 관계가 역전된다면, 굉장히 파괴적인 방식으로 되돌리려 하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