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7일, 트럼프 대통령은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미국의 조선업은 한국의 도움과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을 꺼냈다. 트럼프가 당선된 첫날부터 우리에게 이런 요청을 하리라 예상한 사람은 드물었다. 이는 우리 조선업이 주력 제조업의 위상을 넘어 새로운 국제질서하에서 통상 및 안보 지렛대가 될 것임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조선업은 산업정책이 다시 주목받는 시대에 정부의 역할 재정립을 고민해야 하는 대표적 산업이기도 하다.
일본 자민당, 조선업 재생 위해 공정거래법 적용 재검토 등 요구
규제 환경 달라져 다양한 친환경 선박 기술에 적극적 투자 필요
미국이 협력 원하는 MRO와 벌크선 건조 등은 우리 주력 벗어나
성공하려면 국가 차원의 체계적 준비와 긴밀한 의사소통 있어야
세계 1~3위 조선소 보유한 한국
우리 조선업은 대형 3사를 중심으로 상당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 삼성중공업은 세계 1~3위 규모의 조선소를 가지고 있으며, 대형 LNG운반선 등 고기술 선박에서 중국·일본보다 크게 앞선 건조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전체 물량으로 보면 중국이 이미 압도적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기업별 규모로 보면 18개의 조선소를 보유한 중국 국영기업 CSSC가 한참 앞선 1위이고, 상위 10개 기업 중 6개가 중국 기업이다. 중국 기업들은 2024년 세계 선박 수주의 70%를 쓸어 담으며 15%의 한국과 7%의 일본을 크게 따돌렸다. 건조량 기준으로도 중국과 한국의 점유율은 53%대 28%로 큰 차이가 난다.
자동화가 어렵고 고된 작업을 요구하는 조선업의 특성과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몇 차례 위기를 겪은 경험 때문에, 한국 조선업의 장래를 어둡다고 보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조선업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보면 쉽게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해양패권과 무관한 한국은 왜 강한가 대항해 시대 이래 조선업은 늘 해양 패권을 확보한 국가가 주도했다. 해운 수송은 세계 무역의 90%를 담당하고 있으며, 전함의 군사적 가치가 달라지지 않는 한, 조선업의 중요성은 지속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전후로는 미국과 유럽이, 이후에는 일본으로 넘어갔던 세계 조선업의 주도권을 해양 패권과는 무관한 한국이 이어받았던 것은 놀라운 전개였다.
조선업의 경쟁력은 대규모의 선박 수요와 튼튼한 제조업 기반을 확보하지 않고는 얻기 어렵다. 막대한 시설투자와 관리능력이 필요하고, 수주에서 인도까지 몇 년이 걸리며, 시장 예측은 종종 빗나가는 난해한 산업이다. 당시에는 몰랐던 한 번의 전략적 선택의 실수가 돌이키기 어려운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국은 온화한 기후의 바다에 면해 있고, 우수한 노동력을 갖췄으며, 철강과 기계 등 기반 산업을 확보한 드문 나라다. 조선업과 잘 맞는 조건을 가졌지만 1980년대 일본의 전략적 실수가 아니었다면 주도권 국가가 되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치솟는 원가 부담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 주도로 구조조정과 표준화된 생산방식 도입에 나섰다. 그 결과 원가절감에 성공하고 세계 1위를 장기간 유지할 수 있었지만, 대가로 대형 선박의 건조 능력과 고객 맞춤형 기술력을 상실하였으며, 지금도 한국의 기술우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경험 역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2008년 금융위기는 국내 중소형 조선사들이 대거 무너지며 중국으로 주도권이 확실히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시황 급변을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기업의 능력 부족이 컸지만, 우량기업임에도 키코(KIKO) 금융상품 손실로 사라지는 걸 방치하는 등 정부도 조선업 기반 유지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책임이 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2015년에는 해양플랜트 투자의 참담한 실패로 인한 위기를 겪었음에도 대형 3사의 경쟁력을 보존할 수 있었고, 다시 찾아온 호황을 맞고 있다는 점이다.
요약하면 한국이 조선업에서 지금처럼 경쟁력을 확보한 것은 여건과 노력, 실력과 운이 모두 작용한 결과다. 앞으로도 중국이라는 버거운 경쟁자를 상대해야 하지만, 쉽게 포기하거나 단기적 시야로 접근해서도 안 된다. 국제정세의 흐름과 장기적 시장 전망을 바탕으로 전략적 판단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산업정책이 가장 요구되는 업종이기도 하다.
친환경 전환과 한·미 협력의 기회 해운산업은 전 세계 온실가스 배출량의 약 3%를 배출하는 고탄소 배출업이다. 국제해사기구(IMO)는 2050년까지 탄소중립 달성을 목표로 규제를 확대하고 있다. 유럽연합(EU) 역시 배출권 거래제, 해상연료 기준 등 규제를 도입하며 선박의 친환경화를 압박하고 있다.
친환경 규제는 저탄소 및 무탄소 연료추진 선박의 신규 수요는 물론, 기존 선박의 교체나 개조 수요를 빠르게 높일 것이다. 대표적 조사기관인 클락슨 리서치는 선박 발주 수요가 2050년까지도 고수준을 지속하는 등 초장기 호황 사이클이 시작된다고 예상한다. 다만 우리 주력 분야인 LNG운반선 수요는 2028년 이후에는 줄어들 것이며, 선박 개조 시장도 수리에 강점을 지닌 중국이 주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은 위협요인이다. 기회를 살리려면 다양한 친환경 선박 기술에 대한 적극적 투자가 필요하다.
한·미 조선 협력 역시 새로운 기회요인이다. 냉전 종식 이후 미국의 조선업은 크게 약화하였고, 이는 중국의 부상과 대조되며 군사적으로나 경제안보 관점에서 미국에 큰 위협이 되고 있다. 중국의 전투함 수는 2015년 이후 미국을 추월하며 격차를 벌리고 있다. CSSC의 장난(Jiangnan) 조선소와 대련(Dalian) 조선소에서는 전투함 15척과 이지스함 5척을 동시 건조할 수 있지만, 미국의 FMM 조선소는 10척의 주문이 밀려도 1년에 1척을 겨우 건조하는 실정이다. 미 해군의 유지보수(MRO) 수요를 처리하는 데만 20년이 걸려 기다리다 못해 군함을 퇴역시키기도 한다.
중국의 해양패권 확대로 남중국해와 대만해협 긴장이 높아지고, 지구 온난화로 북극 항로 경쟁과 미·중 통상마찰이 심화하자 미국은 조선업 재건과 중국 견제 노력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 무역대표부는 지난 4월 중국산 선박 및 중국 선사 소유 선박에 입항 수수료를 물리기로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통과시킨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BBBA)’에는 군함 조달 및 조선업 육성을 위한 수백억 달러의 예산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미 붕괴한 미국의 조선업을 재건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불가능할 수도 있다. 미국이 우리의 조선 협력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유다. 군함 MRO와 신규 군함 건조 참여, 미국 조선소 투자 및 상선 건조 협력, 알래스카 LNG와 같은 극지 개발 쇄빙선 건조 등 가능한 분야는 다양하다.
넘어야 할 산도 적지 않다. 미국이 원하는 MRO 사업이나 벌크선 건조 등은 이미 우리의 주력 분야에서 벗어난 사업이다. 미국산 선박만 미국 연안 해상운송을 허용하는 존스법(Jones Act)도 걸림돌이다. 현지 조선소 투자 역시 인력이나 기자재 등 산업 생태계가 크게 미흡한 상태여서 효과가 미지수다. 국가 차원의 체계적인 준비와 빠르고 긴밀한 의사소통, 장기적 투자 없이는 결실을 기대하기 어렵다.
조선 업무의 해수부 이관, 패착될 수도 이제는 조선업 육성을 국가안보의 차원에서 새롭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우리보다 먼저 움직였다. 최근 자민당에서는 ‘일본 조선업 재생을 위한 긴급 제안’을 통해 조선업이 ‘경제·국민 생활을 지탱하며 안보 관점에서도 필수적인 기반’임을 재인식할 것과 적극적 육성 정책을 요구하였다.
구체적으로는 군함과 상선 건조 기반 확대를 위한 1조엔 이상의 기금 창설, 국립 조선소의 설립 검토, 기업 간 정보교환 및 구조 재편에 대한 공정거래법 적용 재검토, 외국 인재의 적극적 유치 및 활용, 차세대 탈탄소 선박 시장 지배력 확보를 위한 선제적 지원, 미국 군함 MRO와 함정 건조 협력 강화, 글로벌 사우스·북극권 연계 등 국제협력 확대, 일본 내 해운 선주 육성을 통한 안정적 수주량 확보 등이 제시되었다. 하나하나 우리도 생각해 볼 만한 적극적이고 야심적인 제안들이다.
이재명 정부도 대선 과정에서 조선업 관련 공약을 여럿 제시했으며, 업계도 긍정적으로 기대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조선업의 중요성을 고려하면 더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은 해양수산부의 부산 이전 추진과 더불어 조선 업무의 해수부 이관을 주장하는 움직임이다. 조선업의 광범위한 제조업 연계 효과나 신국제질서 하의 핵심적 위치, 해운과 조선을 묶은 실패 사례로 보이는 일본의 경우 등을 고려하면 해운업과의 시너지만을 고려하는 것은 패착이 될 수도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