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과 불안이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을 때 가장 피해야 할 일은 자꾸만 ‘모든 세상’의 중심에 나를 세우는 일입니다. 그러나 정확히는 나는 ‘내 세상’의 중심이고, 다른 사람 세상의 중심에는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가장 건강한 마음의 틀입니다. 모든 세상에서 환영받고 이해받을 수 있는지 머릿속으로 지레 생각하고 자기 존재의 의미와 정체성에 천착하는 게 자의식 과잉의 씨앗, 내 고통의 시작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중요한 작업이지만 이는 건강할 때 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더욱이 정체성은 시간과 맥락에 따라 그 모습을 달리하므로 긴 시간을 두고 느슨하게 작업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울할 때 가장 피해야 할 일은
세상의 중심에 나를 세우는 일
사람들은 나만 관찰하지 않아
생각해보세요. 제가 마트에서도, 분리수거장에서도, 가족들 앞에서도 교수라는 정체성에 몰두해 있다면 그 꼴이 얼마나 딱할까요.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교순데’ 자의식의 괴물이 되어 학생들을 앉혀두고 의도 가득한 말과 행동을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측은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는 누구와도 진실로 접촉하지 못합니다. 머릿속은 자기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고, 행동은 작위적이고 부자연스러워집니다. 지금 이 순간을 모조리 놓칩니다.
분석 마비(Analysis Paralysis)라는 심리학적 개념이 있습니다. 너무 많은 생각을 거듭하다, 오히려 그 무엇도 시작하지 못하고 얼어 붙어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누군가 지네에게 “넌 어떻게 그렇게 유려하게 움직이니?” 하고 물었고, 스스로의 걸음걸이를 생각하기 시작한 지네가 별안간 걷는 법을 잊었다는 이야기가 분석 마비의 예가 됩니다.
현실과 접촉하지 못하고 규칙(‘나는 이래야만 하고, 사람들은 응당 저래야만 하고’)과 가정(‘내가 성공하기만 하면 나는 행복해질 거야’)이 기이한 논리의 벽을 세웁니다. 다른 사람들과도 섞이지 못하고 이다음 발자국을 내디딜 수 없습니다. 오히려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기능적인 나를 잃고야 맙니다. 이런 이유로 심리학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반복해서 강조하는 이야기는 두 가지입니다. 가상의 청중(Imaginary Audience)에서 벗어날 것. 개인적 우화(Personal Fable)를 주의할 것.
임상발달심리학자였던 데이비드 엘킨드(David Elkind)는 스스로에게 몰두 되어 있고 타인도 나만큼 나에게 관심 있을 것이라 굳건히 믿는, 청소년기 특유의 자기 중심성에 대한 이론을 정립했습니다(1967). 이 이론에서 두 가지 핵심적인 구성요소는 가상의 청중과 개인적 우화입니다.
청소년들은 수많은 사람들(가상의 청중)이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으며 자신의 외모나 능력치를 두고 매일 깊은 생각에 빠져듭니다. 이때 경험하는 자신만의 감정, 생각, 고통과 번뇌를 몇 시간이고 곱씹고 이 세상 누구도 완전히 이해해줄 수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자신의 이야기(개인적 우화)에 굉장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어차피 다른 사람에게 이 모든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해봤자 소용도 없다는 생각에 타인과 거리를 두고 날을 세웁니다. 이해받지 못한다는 생각, 모든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극도의 분노감과 외로움을 느낍니다. 여기까지가, 청소년기에 일단 한번 끝내야 하는 일들입니다.
청소년기에는 그럴 수 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 지나와야 하는 과업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성인기 내내 지속되면 이게 자의식 과잉입니다. 자기가 만든 괴이한 자기만의 세계에서 갑자기 ‘내가 낸데!’ 주술에 빠지거나 ‘나는 사라져야 돼’ 병이 옵니다. 아… 그러나 굳이 안 그러셔도 됩니다.
있지도 않은 관객들을 두고 섀도복싱을 하고, 내가 만든 내 정체성 안에 갇혀, 해야‘만’ 하는 일들과 하지 않아야‘만’ 하는 일들을 끊임없이 수정하고 되뇌고 매일을 경계하고 분석하며 살다가는, 걷는 법을 잊는 지네가 되어 개인적 우화를 눈물로 적어 내리며 자기 굴 안에 머무르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 왜요? 누구보다(누군가를 의식하지 않았을 때는 더욱이) 잘 걸을 수 있었잖아요. 경직된 규칙과 가정 금지, 자의식 과잉 금지, 특히 잠들기 전 깊은 생각 금지입니다.
저를 시험 삼아 떠올려 보세요. 제가 진실로 가상의 청중과 자기 중심성에서 자유로워지고, 제 삶에 몰입하고, 제 고난과 희비극에 유별난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답을 알고 계시겠지요. 끊임없이 현실접촉을 하는 것입니다. 매일 결함 가득한 나 자신을 만나고, 결함 가득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만 행동하고, 내 모든 지금의 변화무쌍한 순간에 호기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입니다. 내 가족들이나 일터에서 만나는 사람들, 상점의 직원들과 우연한 만남 모두에서, 순간순간 접촉하고 함께 머무르는 것입니다. 만나고, 행동하세요. 매일 행동하는 한, 내가 중심에 선 나의 세계는 단정하고 견고하게 깊어집니다. 청중도, 서사도 필요 없는, 내게 가장 적절한 세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