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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인의 근대 일본 산책] “일본도 위험하지만, 서양에 승리하는 건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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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7.10 08:22 2025.07.10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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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작가 라프카디오 헌의 120년 전 예측
윤상인 전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
라프카디오 헌(Lafcadio Hearn, 1850~1904)이라는 아일랜드계 영국 작가가 있었다. 일본에서 14년간 체류하며 영문 저작 활동을 통해 일본의 전통세계를 서양에 알린 인물이다. 자신의 집에서 일하던 하녀 고이즈미 세쓰와 재혼하고 그녀의 성을 따서 고이즈미 야쿠모(小泉八雲)라는 이름으로 귀화, 일본인이 되었다.

헌은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그리스 레프카다 섬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 군의관 아버지와 그리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의 이혼으로 더블린의 고모할머니 집에서 성장했다. 16세가 되던 해, 사고로 한쪽 눈을 실명했다. 고모할머니가 파산하자 다니던 학교를 중퇴, 19세가 되던 1869년 이민선을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첫 직업은 신시내티 지역의 유력일간지 기자였다. 타고난 글재주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서인도제도 마르티니크 여행기로 명성을 얻었다.

일인 하녀와 결혼, 귀화까지 했지만
중국 근대화는 서양의 위기 단언

중국인의 적응력·근검 최대 장점
일본의 과학·예술 분야 높게 평가

청일전쟁 직후 대두된 황화론
중국만 경계하자 일 작가 불만 토로

1882년 3월 미국 주간지 더 와스프(The WASP)에 실린 조지 켈러의 삽화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삽화 왼쪽에 팔이 여럿 달린 중국 남성이 다양한 역할을 혼자서 해내는 데 반해 오른쪽의 미국 청소년들은 하릴없이 거리를 배회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사진 윤상인]
라프카디오 헌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일본인 이상으로 일본을 깊이 이해한 서양인’으로 통한다. 그러나 이는 ‘평생에 걸쳐 일본을 사랑한’ 벽안의 외국인에 대한 우호의 감정에서 표출된 다소 과장된 표현이다. 여러 나라를 방랑하며 신비롭고 이국적인 것을 동경하던 헌은 일본에 와서 자신이 보고자 했던 일본의 모습만을 글에 담았다. 자본주의 경쟁원리가 지배하는 서구 문명을 혐오했던 그는 일본을 소박하고 순수한 영성이 살아있는 대안의 장소로 이상화해야 했다. 헌 스스로가 토로했듯이 그는 일본 신문을 읽을 수 없었다. 그가 말하는 짧은 일본어는 매우 독특해서 오직 부인 세쓰 만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다행히도 듣는 능력은 상대적으로 좋아서 그는 부인이 들려주는 일본의 옛날이야기를 영어로 재창작했다.

서구열강의 동점과 그 후과
굴곡 많은 그의 삶만큼이나 그가 쓴 글의 범주는 광대하다. 18세기 영국 낭만주의 시에 대한 그의 평론은 읽는 사람을 단숨에 사로잡을 정도로 정교한 설득력이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일본과 서양의 미래를 내다본 몇몇 논설은 남다른 통찰이 담긴 격조 높은 문명비평에 해당한다. 사후 100년이 훌쩍 지난 이 시점에서 라프카디오 헌을 불러낸 이유이다.

조셉 케플러의 1878년 삽화 ‘고용주를 위한 그림’. 왼쪽 그림(‘어떻게 그들은 하루에 40센트로 생활 할 수 있을까’)의 중국인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집단생활을 하는 반면 오른쪽 그림(‘그리고 그들은 할 수 없다’)의 백인 노동자 가정은 여유 있는 모습이다. [사진 윤상인]
헌은 1904년 1월 일본 구마모토에서 ‘극동의 미래’라는 강연을 했다. 중국과 일본을 묶어 두 나라의 미래를 논하는 내용이었다. 200자 원고지 50매 분량의 이 글에서 그는 일본보다는 중국에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그는 중국 땅을 밟은 적이 없지만, 그러나 기자로서 미국 서부의 중국인 노동자와 관련된 폭동·학살 등의 동향을 파악해왔다. 당시 몇몇 서양 지식인이 출판한 서양문명 쇠망론(예를 들면 찰스 피어슨의 『국민의 생활과 특질』, 1893)에 거론된 중국·일본 등의 기술 내용에 자극을 받기도 했다.

헌에 의하면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이 시장개척을 목적으로 유색인종의 지역에 진출하여 이익을 챙기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화근을 남긴 일이었다. 예컨대 서양 열강은 완강히 저항하는 중국을 굴복시키거나 약체화하는 데 실패한 데 이어, 중국 상대 무역에서도 학습능력이 뛰어난 중국 상인들이 만만치 않은 경쟁 상대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중국인들은 무역을 독점하고 갖가지 상업에 진출함으로써 미국인 노동자를 시장에서 몰아냈고, 이에 격분한 백인들은 폭동과 학살로 대응했다. 헌에 의하면 이 모두가 강제로 동아시아 각국의 항구를 열어젖힌 서양세력이 자초한 사태이다.

인종 간 경쟁의 서막
1904년 T 비앙코의 삽화 ‘황인종에게 길을 열어라’. 일본을 상징하는 인력거에 러시아 황제가 깔리고 프랑스·영국·독일 지도자들은 도망친다. [사진 윤상인]
헌은 중국에 대해 논한 다른 글에서 “청국 민중의 대부분은 놀라운 인내력, 지칠 줄 모르는 근면함, 변함없는 충성심, 가혹한 조건에서의 복종심을 지니고 있다”(‘중국의 미래’)고 적었다. 그러나 그는 중국인들이 보여주는 모든 환경에 대한 자기적응력과 검약 정신이야말로 서양문명을 위협하는 중국인만의 최대 장점이라고 봤다. 예를 들면 영·중 양국의 기술자가 비슷한 정도의 숙련도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할 때 중국인이 영국인의 5분의 1의 돈으로 생활할 수 있다면 영국인 기술자는 시장에서 퇴출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캘리포니아의 중국인 노동자는 현지인들의 10분의 1의 비용으로 생활한다. 이 현실을 민족 또는 문명 단위로 확장하여 적용할 경우, 두 세력이 동등한 재능과 지력을 가지고 있다면 서양문명이 지구상에서 패퇴할 가능성이 크다. 단지, 중국이 아직 서양의 산업방식과 기계장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점은 서양에게는 행운이라고 헌은 말한다. 그러나 결국 언제가 중국이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 서양의 과학과 산업을 채용하는 것은 확실하며, 그때 서양은 50년 전에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단언한다.

헌은 자신의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일본을 사례로 든다. 일본은 중국에 비해 상업 면에서의 능력은 뒤처지지만, 상업보다 중요한 과학·기술·예술과 같은 지적 분야에서는 서양과 경쟁할 가능성을 이미 보여준 바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인이 이미 보여준 지적 능력이 동일 문화권에 속하는 중국인들에게도 미개발 상태로 잠재해 있다면 머지않은 장래에 중국과 일본이 동아시아 지역을 대표해서 통상 면은 물론이고 인종 간의 지적 투쟁에 있어서 서양의 강력한 경쟁자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헌의 그런 예측은 2025년 1월 이른바 ‘딥시크 쇼크’를 통해 충분히 현실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황화론의 망령
1891년 1월에 촬영한 라프카디오 헌의 모습. [사진 윤상인]
‘황화론(Yellow Peril)’은 우리에게 그다지 익숙한 단어가 아니다. 의미로는 ‘황인종의 위험함에 대한 언설’ 정도가 될 것이다. 황화론이라는 단어가 유럽과 미국의 언론에서 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청일전쟁(1895) 직후이다. 1차 세계대전까지 유행했다. 당초의 주된 표적은 중국이었다. 신기하게도 전쟁의 승자는 일본인데, 패자인 중국을 서구세계에 대한 위협으로 다뤘다. 독일의 대표적인 황화론 논객 힘멜스체르나는 국토·인구·군사·종교 면에서 일본보다 중국이 유럽에 보다 더 큰 잠재적 위협이라고 보았다. 일본이 발화장치라면 중국은 폭탄이었던 셈이다. 러시아·독일·프랑스는 삼국간섭을 통해 본래는 승자 일본의 전리품이었던 랴오둥반도를 러시아에 할양함으로써 발화장치를 제거했다. 독일에 유학했던 소설가 모리 오가이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중국을 유럽의 황화론자들이 주된 논의대상으로 삼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기록을 남겼다. 공격의 표적이 되는 것도 훈장이 될 수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일본이 ‘본격적으로’ 황화론 공격의 표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러일전쟁 직후이다.

라프카디오 헌이 구마모토현으로 근거를 옮기기 전까지 6개월간 살았던 시마네현 마쓰에시의 저택. 일본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 윤상인]
찰스 피어슨 등 서구 문명 위기론자들은 아시아의 흥륭과 서양의 쇠퇴를 논했지만, 아시아의 승리를 점치지는 않았다. 아시아인의 생활 수준이 백인의 그것에 근접하게 되면서 필연적으로 백인 문명의 정신과 도덕적 수준으로 저하하는 방향으로 수렴될 것이라는 ‘문명소멸론’의 관점을 취했다. 그에 반해 라프카디오 헌은 명백히 동아시아의 승리를 점쳤다. “미래는 서양이 아니라 동아시아 편에 서 있다고 나는 믿는다. 적어도 중국에 한해서는 그렇다고 믿는다. 일본의 경우는 위험성이 있다. 나는 일본이 검소함과 질박함을 유지할 때는 강하겠지만, 만일 서양에서 들어온 사치 성향을 받아들인다면 쇠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헌이 강연록 마지막을 채우며 한 말은 그의 알찬 강연내용 중에서 가장 허술한 부분이다. 21세기의 4분이 1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볼 때 동아시아가 승리한다는 그의 예측은 빗나갔다. 아직까지 동아시아는 승리한 적이 없고, 아직 서양은 패배하지 않았다. 검소함과 질박함의 보전이 일본이 승리하는 조건이라는 황당한 전제에서 그는 스스로 오리엔탈리스트로서의 속성을 드러냈고 아울러 그의 예측은 파탄을 잉태했다. 어쩌면 라프카디오 헌이라는 문필가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중 스파이 같은 면모에 주목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의 서양필패론은 서양 독자들에게 학술적 훈련을 받은 백인 필자의 황화론보다 강력한 황인종 경계론이 될 수 있었고, 그의 동아시아 필승론은 일본의 국수주의자·아시아주의자들로부터 박수를 받을 수 있는 언설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인종적 사고가 지배적인 시대에 황화론은 준동한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지구를 뒤덮었을 때, 19세기에나 익숙했던 인종적 사고, 문명과 야만이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스멀스멀 자취를 드러냈다. 언제부터인가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의 외교 전략의 상수가 된 중국봉쇄론은 황화론의 또 다른 변주로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윤상인 전 서울대 아시아언어문명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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