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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장 여는 대신 돈 주고, 간섭 안했더니 K무비, 세계 삼켰다[창간기획 '대한민국 트리거 60'⑦]

중앙일보

2025.07.10 13:00 2025.07.10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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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트리거 60' ⑦ K무비∙드라마의 힘

영화·드라마·가요 등 K콘텐트의 기세가 놀랍다. 지구촌 대중문화의 메인 스트림을 형성하고 있다. 영화 ‘기생충’으로 2020년 작품·감독상 등 아카데미 4관왕을 석권한 봉준호 감독. [로이터=연합뉴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지난 2일 미국 뉴욕타임스가 뽑은 ‘21세기 최고의 영화’ 1위에 올랐다. 일반 관객은 물론 영화 전문가 모두 ‘엄지 척’을 들었다. 5년 전 아카데미 작품·각본상 등 4관왕을 거머쥐며 한국영화사를 새로 쓴 게 어제 일만 같다.

황동혁 감독의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또 어떤가. 지난달 27일 공개된 ‘시즌 3’가 93개국에서 1위를 차지하며 ‘시즌 2’의 종전 기록(92개국)을 갈아치웠다. ‘기생충’과 마찬가지로 양극화 사회에 대한 비판과 유머가 세계인의 공감을 샀다. 이처럼 K무비, K드라마는 요즘 지구촌 대중문화의 메인 스트림을 이끌고 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으로 2022년 에미상 6관왕을 휩쓴 황동혁 감독. [AP=연합뉴스]
필름을 예전으로 잠시 돌려보자. 1999년 6월 24일, 서울 광화문 동아면세점 앞에 영화인 300여 명이 집결했다.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1년 중 146일)인 스크린쿼터를 줄이면 “충무로가 말라죽을 것”이라고 절규했다. 김대중 정부 집권 1년차 때였다. 당시 극장가는 막 멀티플렉스가 생기던 때였다. CGV 1호점인 강변CGV가 1998년 4월 4일 문을 열었고,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이 첫 테이프를 끊었다. 이듬해 강제규 감독의 ‘쉬리’가 200만 관객 잭폿을 터뜨리며 충무로의 르네상스를 예고했다.

정부는 마침 미국과 한미통상협정을 협상 중이었다. 미국영화협회 잭 발렌티 회장이 수차례 비밀리에 방한했다. 발렌티는 할리우드의 에드거 후버(50년간 8명의 대통령을 거친 무소불위의 미 FBI 국장)였다. 영화계에 비상이 걸렸다. 설마 김대중 대통령이 ‘배신’할 것인가에 바싹 긴장했다. 이후 스크린쿼터는 노무현 대통령 때 사실상 없어졌다(2006년 73일로 축소). 2007년 최종 타결된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이 영화계의 앞날을 갈랐다.

기생충 (2020년 아카데미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
1999년 시위에서 임권택 감독은 삭발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배우 강수연, 현재 암 투병 중인 안성기 등은 검은 상복 차림이었다. 당시 이창동 감독이 ‘오더’를 내리면 문성근이 전화를 돌리고, 명계남이 움직이던 모습이 기억난다. 문성근이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박)중훈아. 이번에는 네가 앞줄에 좀 서야겠어. 성기 형하고 같이 서서 행진하면 돼.”

어떤가. ‘전설의 고향’처럼 들리지 않는가. 요즘 스크린쿼터라는 단어를 꺼내는 이는 거의 없다. 한국영화의 경쟁력이 높아져 굳이 ‘쿼터’를 적용할 이유가 없어졌다. 봉준호 감독의 명언처럼 한국영화는 지금 ‘자막, 그 1인치의 장벽’을 넘어 세계로 달려가고 있다.

한국영화 기틀 닦은 신상옥·김기영 감독
오징어게임(2022년 에미상 6관왕, 골든글로브남우조연상)
사실 한국영화는 멈춘 적이 없었다. 해방 이후 빈곤과 전쟁으로 얼룩졌을 때도 사람들은 영화를 봤다. 산업은 일천했으나 사람들은 예전부터 영화가 힐링의 역할을 하는 존재임을 인식했다. 한형모 감독이 ‘자유부인’(1956)에서 보여준 영화사상 첫 키스신이 지금은 되레 새롭다. 1960~70년대에는 한해 200편의 장편영화가 양산됐다. 한국영화 중흥의 주역인 신상옥·이만희·김수용·김기영 등 걸출한 감독이 쏟아졌다. 이들 1세대의 예술혼이 없었다면 이창동도, 홍상수도, 박찬욱과 봉준호도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뉴욕타임스 ‘21세기의 영화’에 ‘올드 보이’(전문가 43위, 일반인 40위)를 올린 박찬욱 감독 역시 세계 영화계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프랑스인이 “에펠탑을 내줄지언정 에밀 졸라는 내줄 수 없다”고 추앙하는 에밀 졸라의 원작 소설 『테레즈 라캥』을 2009년 뱀파이어 버전의, 파격적인 작품인 ‘박쥐’로 변신시키며 그해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탔다. 당시 프랑스 언론은 “박찬욱과 한국영화의 특징은 바로 이 같은 독창성(uniqueness)에 있다”라고 상찬했다. 할리우드 키드에 머물렀던 한국 영화작가들이 자신들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했음을 보여 준 상징적 모멘텀이었다.

한국영화 혁신의 원동력은 개방과 경쟁이다. 스크린쿼터 축소에 따른 위기의식이 콘텐트 경쟁력을 끌어올렸다. CJ·롯데 등 대기업의 영화계 진입도 산업적 기반을 단단하게 다졌다. 한국영화의 성공은 대체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빚을 지고 있다. 실제로 김 대통령 자신이 영화를 좋아했다.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어떤 영화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비교적 근작인 ‘성공시대’(1988)를 얘기했다. 상대 후보였던 이회창은 ‘벤허’(1959)를 꼽았다.

김 대통령의 공헌은 일단 ‘양적 완화’였다.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안 한다’는 슬로건으로 당시로선 막대한 3000억원 펀드를 대중문화에 투입됐다. 그것도 IMF 금융위기 때다. 1996년 야당인 평민당 대표 시절에는 헌법재판소의 ‘모든 검열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끌어내는 데 주요 역할을 했고, 대통령 취임 후엔 영화진흥법을 개정하고 영화진흥위원회를 만들며 영화계 전반의 기초 체력을 키웠다.

K무비의 결정적 전환점은 일본 대중문화 단계적 개방(1998년~2003년)이다. 개방의 역사가 K컬처 역사의 디딤돌인 셈이다. 영화계는 이때부터 역설적으로 해외로 나가는 빗장을 열게 됐다. 한국 시장에 안주하지 않고 일본, 나아가 유럽·미국과 동등한 경쟁을 펼쳐야 했다. 이창동·홍상수·박찬욱·김기덕·봉준호 등 월드 클래스 감독이 대거 등장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자국 영화 시장점유율
현재 한국의 스크린 수는 2700개 정도다. 팬데믹 이전에 비교해 크게 위축된 상태다. 2019년 이전에는 3200개까지 유지됐으며, 연평균 관람 횟수는 여전히 4.3회로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총관객 수는 2억 명에 자국 시장 점유율은 40%대를 기록했다. 그러나 코로나19 쓰나미가 몰려왔다. 2024년 총관객 수는 1억2300만 명까지 줄었다. 연평균 관람 횟수 2.4회, 시장 점유율 36%대로 떨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할리우드 대비 자국 영화 경쟁력이 높게 유지되는 편이다. 다른 나라들이 우리 영화계를 롤모델로 삼으려는 이유다. 예컨대 호주는 4%, 캐나다는 7%, 브라질은 9% 수준이다.

신재민 기자
지난달 중순 상파울루에서 열린 브라질 한국 영화제에 다녀왔다. 현지 영화인들은 놀랍게도 한국의 스크린쿼터 제도를 연구하고 있었다. 브라질 우니시노스대 영상제작과 조스마르 교수 등 브라질 영화학자들은 한국의 스크린쿼터 제도, 김대중 정부의 영화정책 등을 주제로 한 논문을 속속 내놓고 있었다. K무비는 물론 관련 정책에까지 눈을 돌리고 있었다.

현재 한국 영화계는 깊은 늪에 빠진 상태다. 코로나19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넷플릭스 등 OTT의 약진으로 영화 소비 양상도 급변했다. 하지만 K드라마는 여전히 놀라운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오징어 게임’ ‘폭싹 속았수다’ 등의 잇따른 흥행은 이제 뉴스거리가 아닐 정도다. 감독·배우 등 영화와 드라마의 인적 교류도 활발하다. 영화산업의 규모와 질, 현황과 미래는 OTT 등 신흥 미디어와의 융합, 영화와 드라마를 포괄하는 전체 콘텐트 산업으로 조망해야 한다는 얘기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김대중 시대의 오래된 영화법은 새로운 융합형 법안으로 재정비해야 하고, 그것도 시급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달콤한 인생’의 김지운 감독은 2023년 ‘거미집’으로 쓴맛을 봤다. 전국 30만 관객을 모으는 데 그쳤다. ‘거미집’은 1960년대 김기영과 신상옥 감독 시대의 얘기다. 영화 속에서 김 감독(송강호)은 신 감독(정우성) 밑에서 일을 배웠다. 신 감독은 촬영 중 불의의 화재 사고로 타계한다. 신작 제작으로 탈진한 김 감독은 깜빡 졸다가 신 감독의 환영을 본다. 그때 신 감독이 말한다. “그냥 하는 거야. 누가 뭐라든 영화는 처음 생각했던 대로 밀고 나가는 거야.”

‘거미집’은 영화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경각의 위기 속에서도 영화는 끝내 살아나야 한다는 점을 얘기하는 ‘영화의 영화’다. 한국영화는 광복 80년의 영광처럼 다시 살아나고, 새로운 시대를 향해 해방될 것이다. 영화 속 신 감독의 말대로 ‘그냥 하는 것’이다. 그렇게 세계 시장을 향해 밀고 나가는 것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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