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시선] 불신임안 '가뿐히' 살아남은 EU수장, 위기는 이제부터?
부결됐지만 정치적 입지 위축 방증…친정 정치그룹서 '기권' 이탈표도
(브뤼셀=연합뉴스) 정빛나 특파원 = "외부 세력들이 우리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분열시키려는 지금, 우리 가치에 따라 대응하는 것이 의무입니다. 감사합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자신에 대한 불신임안이 부결된 직후 10일(현지시간) 엑스(X·옛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이날 불신임안 표결은 찬성 175표, 반대 360표, 기권 18표로 가결 요건(투표자의 3분의 2 찬성)이 충족되지 않았다.
그가 지칭한 '외부 세력'은 이번 불신임안 표결을 주도한 유럽의회 극우진영을 가리킨 것이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표결을 앞둔 지난 7일 유럽의회 본회의에서 한 연설에서도 불신임안 상정을 지지한 의원들을 '러시아 꼭두각시'라고 지칭하며 맹비난했다.
당시 "극단주의자들이 역사를 다시 쓰게 해선 안 된다"며 불신임안을 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자신을 끌어내리려는 이번 시도가 극우·반(反)EU·친러 성향 일부 의원들에서 촉발된 것이라는 분명한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이런 시각이 완전히 틀렸다고 볼 순 없다.
불신임안은 극우 성향 정치그룹 '유럽 보수와 개혁'(ECR)의 루마니아 출신 초선 게오르게 피페에라 의원이 주도했고, 상정 요건(전체 의원의 10%·72명)을 넘긴 77명 동의를 얻어 상정됐다.
이날 표결에서 찬성표는 가결 요건(약 360표)에 한참 못 미치는 175표에 그쳤고, 그마저도 대부분 ECR, 오르반 빅토르 헝가리 총리의 '유럽을 위한 애국자'(PfE), 극우 독일대안당(AfD)이 속한 '주권국가의 유럽'(ESN) 등 극우·강경우파 정치그룹 소속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날 표결에는 전체 720명 중 553명만 참여했는데, 바로 직후 몇 분 뒤 진행된 다른 안건 표결에는 636명이 참여했다. 일부 의원들은 의도적으로 표결에 불참한 셈이다.
특히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이 속한 유럽국민당(EPP)과 일종의 '대연정'을 구축해온 사회민주진보동맹(S&D), 리뉴 유럽(Renew EUrope)은 각각 25%, 16%가 불참했다.
친EU 성향으로 분류되는 녹색당은 불참률이 36%에 달했다.
불신임안을 저지하려 했다면 가급적 한 명이라도 더 참석해 반대표를 던지는 것이 상식이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의 불안한 정치적 입지를 방증하는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날 기권을 한 18명 의원 중에는 EPP 의원이 2명 포함됐고, S&D, 리뉴 유럽 의원은 8명이었다.
'반대'까진 아니지만 폰데어라이엔을 전적으로 지지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2019년 처음 취임했을 때만 해도 기후대응, 친환경 산업 전환 등을 최우선 의제로 앞세워 추진했다.
EPP와 S&D가 '중도'라는 이름으로 연대할 수 있었던 것도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다.
그러나 작년 12월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이후에는 경쟁력 강화, 기업 부담 완화 필요성을 이유로 1기 집행부에서 추진했던 간판 정책을 잇달아 완화하거나 연기해 S&D의 강한 반발을 사고 있다.
최근 무기 공동대출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과정에서는 시급성을 이유로 정상적인 입법 절차를 거치지 않아 유럽의회 분노를 샀다. 소통 부재, 불투명성, 권력 집중화에 대한 비판도 끊이지 않는다.
익명의 EU 고위 당국자는 유로뉴스에 "내부에서는 이번 사태를 '경고'로 보고 있다. 극도로 중앙 집권적이며 종종 정치적으로는 모호해 보이는 리더십 스타일이 폰데어라이엔을 취약하게 만들었다"고 털어놨다.
'리뉴 유럽'의 발레리 아이예르 대표는 이날 엑스에 "폰데어라이엔에 대한 우리의 지지가 무조건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번 사태를 그저 '소수의 반란'으로만 치부하지 말라는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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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빛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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