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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억원이 넘는 가격에도 통풍 시트나 리클라이닝 기능 같은 편의 장치는 없다. 그 대신 거침없이 진흙탕 위를 달리고 울퉁불퉁한 바윗길을 거뜬히 넘을 수 있는 힘과 기술을 갖췄다. 안락함이 아닌 차의 본질을 지향하는 스포츠유틸리티 차량(SUV), 영국 이네오스 오토모티브(INEOS Automotive)사의 ‘그레나디어(Grenadier)’ 얘기다.
둥글둥글한 도심용 SUV와는 거리가 먼 외모다. 그레나디어는 투박하고 각졌다. 당장 전쟁 영화의 소품으로 써도 될 만큼 실내외에서 밀리터리 느낌이 물씬 풍긴다. 전자제품을 닮아가는 요즘 차들과 달리 기계적이다. 첨단 대신 아날로그 감성을 앞세운 정통 오프로더다.
그레나디어는 랜드로버 디펜더의 변신을 안타까워한 한 영국인 거부의 집념으로 탄생했다. 글로벌 석유화학기업인 이네오스를 이끌던 짐 래트클리프 회장은 모터스포츠 마니아다. 구형 디펜더의 명맥이 끊기는 것을 아쉬워한 그는 재규어 랜드로버에 생산권을 인수할 수 있겠느냐는 요청까지 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그는 “내 손으로 직접 만들겠다”며 SUV 제작에 나섰다.
차량 제작 경험이 없었던 그는 세계 각국의 기술을 끌어모아 본격적인 SUV 개발에 착수했다. 영국이 설계를 주도하고, 핵심 부품은 독일에서, 생산은 프랑스 함바흐에 위치한 옛 메르세데스-벤츠의 초소형차 공장을 인수해 진행했다. ‘영국의 철학, 독일의 기술력, 프랑스의 장인정신’이 결합된 결과물이었다.
그레나디어는 ‘척탄병’을 뜻하는 단어로, 듣기만 해도 강한 인상을 준다. 래트클리프 회장이 자주 찾던 한 선술집 간판에서 따왔다는 건 뜻밖이다.
차량의 성격을 드러내듯, 실내 역시 외관 못지않게 강렬하다. 군더더기 없이 항공기 조종석을 연상시키는 큼직한 버튼과 다이얼을 채용해 두꺼운 장갑을 낀 상태에서도 쉽게 조작할 수 있다. 시베리아와 같이 극한 환경에서도 완벽하게 차량을 제어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파워트레인은 독일제 조합이다. 신뢰도 높은 BMW의 3.0L 직렬 6기통 터보 엔진에 ZF의 8단 자동변속기를 달았다. 풀타임 4륜구동은 물론 험로 주행을 위한 저단 기어와 3개의 디퍼런셜 락을 갖췄다.
당연히 험로에서 진짜 실력을 발휘한다. 일체형 차축 덕분에 한쪽 바퀴가 공중에 떠도 다른 쪽 바퀴는 지면에 단단히 밀착된다. 디퍼런셜 락 기능을 이용해 네 바퀴를 동시에 굴리면 바퀴 하나만 지면에 닿아도 험로를 탈출할 수 있다. 최대 등판 각도는 45도, 최대 도강 수심은 80㎝에 이른다.
일반 도로에서의 주행감은 아쉬울 수 있다. 사각형 차체는 고속 주행 시 풍절음을 유발하고, 일체형 차축은 승차감을 떨어뜨리지만, 차량 성격을 고려하면 그리 나쁜 수준은 아니다.
편의성을 앞세운 SUV가 넘쳐나며 운전은 편해졌지만, 내구성은 눈에 띄게 떨어졌다. 험지에선 고장 한 번에 속수무책이다. 래트클리프 회장은 이런 차를 ‘스쿨 SUV’라 부른다. 비단길만 달리는, 연약한 SUV를 꼬집은 말이다. 그레나디어는 이 허점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불편함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 차는 분명 매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