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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도 바윗길? 그냥 넘는다… 英재벌이 만든 진짜 SUV [스튜디오486]

중앙일보

2025.07.11 15:09 2025.07.11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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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튜디오486]은 중앙일보 사진부 기자들이 발로 뛰어 만드는 포토스토리를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중앙일보는 상암산로 48-6에 있습니다. "

그레나디어는 군용차를 연상케 하는 강인한 외관과 뛰어난 험로 주행 성능을 갖춘 오프로더다. 차체가 심하게 비틀려도 잡소리 없이 주행을 이어갔다.
1억원이 넘는 가격에도 통풍 시트나 리클라이닝 기능 같은 편의 장치는 없다. 그 대신 거침없이 진흙탕 위를 달리고 울퉁불퉁한 바윗길을 거뜬히 넘을 수 있는 힘과 기술을 갖췄다. 안락함이 아닌 차의 본질을 지향하는 스포츠유틸리티 차량(SUV), 영국 이네오스 오토모티브(INEOS Automotive)사의 ‘그레나디어(Grenadier)’ 얘기다.

차체는 박스형 사다리꼴 프레임을 기반으로 설계됐다. 단순하지만 강인하며, 비틀림에도 뛰어난 안정성을 발휘한다.
둥글둥글한 도심용 SUV와는 거리가 먼 외모다. 그레나디어는 투박하고 각졌다. 당장 전쟁 영화의 소품으로 써도 될 만큼 실내외에서 밀리터리 느낌이 물씬 풍긴다. 전자제품을 닮아가는 요즘 차들과 달리 기계적이다. 첨단 대신 아날로그 감성을 앞세운 정통 오프로더다.

강원도 인제 스피디움 오프로드 파쿠르(Offroad Parcours)에서 그레나디어가 가파른 계단을 망설임 없이 내려서고 있다.
그레나디어는 랜드로버 디펜더의 변신을 안타까워한 한 영국인 거부의 집념으로 탄생했다. 글로벌 석유화학기업인 이네오스를 이끌던 짐 래트클리프 회장은 모터스포츠 마니아다. 구형 디펜더의 명맥이 끊기는 것을 아쉬워한 그는 재규어 랜드로버에 생산권을 인수할 수 있겠느냐는 요청까지 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그는 “내 손으로 직접 만들겠다”며 SUV 제작에 나섰다.

트랙터와 건설 장비용 부품을 생산하는 이탈리아 카라로(Carraro)와 공동 개발한 전용 차축을 적용했다. 하체 설계에 공을 들인 결과, 그레나디어는 뛰어난 내구성과 주행 안정성을 확보했다.
5링크 서스펜션은 일체형 차축과 결합돼 거친 지형에서도 뛰어난 차체 지지력을 발휘한다. 구형 디펜더 등 정통 오프로더에서 볼 수 있는 구조다.
차량 제작 경험이 없었던 그는 세계 각국의 기술을 끌어모아 본격적인 SUV 개발에 착수했다. 영국이 설계를 주도하고, 핵심 부품은 독일에서, 생산은 프랑스 함바흐에 위치한 옛 메르세데스-벤츠의 초소형차 공장을 인수해 진행했다. ‘영국의 철학, 독일의 기술력, 프랑스의 장인정신’이 결합된 결과물이었다.

실내는 직선 중심의 간결한 구조와 물리 버튼 위주 조작계로 구성돼 있다. 항공기 계기판을 연상시키는 컨트롤 패널이 특징이며, 장식보다 실용성을 우선한 설계가 돋보인다

그레나디어는 ‘척탄병’을 뜻하는 단어로, 듣기만 해도 강한 인상을 준다. 래트클리프 회장이 자주 찾던 한 선술집 간판에서 따왔다는 건 뜻밖이다.

‘TOOT’ 버튼은 자전거 이용자와 보행자를 배려한 저음 경적이다. 사이클팀을 운용하는 이네오스의 안전 철학이 차량에도 이어진 셈이다.
속도와 주행 정보는 중앙 터치스크린을 통해 확인하고, 운전석 정면에는 경고등 패널만 남겼다. 험로 주행 시 시야 확보를 고려한 설계다.
운전자와 조수석 천장에 위치한 사파리 윈도우는 환기를 위해 틸트 또는 완전 분리가 가능하다. 전동 방식은 아니다.
차량의 성격을 드러내듯, 실내 역시 외관 못지않게 강렬하다. 군더더기 없이 항공기 조종석을 연상시키는 큼직한 버튼과 다이얼을 채용해 두꺼운 장갑을 낀 상태에서도 쉽게 조작할 수 있다. 시베리아와 같이 극한 환경에서도 완벽하게 차량을 제어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BMW의 3.0리터(B58) 직렬 6기통 터보차저 엔진은 다양한 차량에 탑재되며 성능을 이미 입증받았다. 286마력으로 세팅된 이 엔진의 복합 연비는 리터당 5.5km다. 보닛에는 가스 리프터가 적용되지 않았다.
파워트레인은 독일제 조합이다. 신뢰도 높은 BMW의 3.0L 직렬 6기통 터보 엔진에 ZF의 8단 자동변속기를 달았다. 풀타임 4륜구동은 물론 험로 주행을 위한 저단 기어와 3개의 디퍼런셜 락을 갖췄다.

깊게 파인 험로에서도 타이어 접지력을 유지하는 비결은 일체형 차축이다.
일체형 차축은 좌우 바퀴가 하나의 축으로 연결된 구조다. 한쪽 바퀴가 떠올라도 반대쪽 바퀴가 지면을 보다 강하게 눌러 접지력을 유지한다. 험로 주행에 유리한 이유다.
그레나디어는 오프로드 성능에 초점을 맞춘 만큼, 온로드 승차감과 조향 민첩성에서는 일정 부분 타협이 필요하다.
당연히 험로에서 진짜 실력을 발휘한다. 일체형 차축 덕분에 한쪽 바퀴가 공중에 떠도 다른 쪽 바퀴는 지면에 단단히 밀착된다. 디퍼런셜 락 기능을 이용해 네 바퀴를 동시에 굴리면 바퀴 하나만 지면에 닿아도 험로를 탈출할 수 있다. 최대 등판 각도는 45도, 최대 도강 수심은 80㎝에 이른다.

제로백(0-100km)은 8.6초, 최고 속도는 160km/h다.
일반 도로에서의 주행감은 아쉬울 수 있다. 사각형 차체는 고속 주행 시 풍절음을 유발하고, 일체형 차축은 승차감을 떨어뜨리지만, 차량 성격을 고려하면 그리 나쁜 수준은 아니다.

차체 전고가 높고 적재 공간이 넉넉한 그레나디어는 차박에도 유리하다. 실내는 간결하지만 기능 위주 설계로 활용도가 높다.
그레나디어는 진흙투성이가 될 각오로 제작됐다. 실내 바닥은 배수 밸브를 통해 물청소가 가능하며, 각종 스위치는 고압수를 견디는 IP54K 등급 방수 설계를 적용했다.
버튼 방식 대신 열쇠를 꽂고 돌려 시동을 건다. 전자 장치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험지에서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선택이다.
편의성을 앞세운 SUV가 넘쳐나며 운전은 편해졌지만, 내구성은 눈에 띄게 떨어졌다. 험지에선 고장 한 번에 속수무책이다. 래트클리프 회장은 이런 차를 ‘스쿨 SUV’라 부른다. 비단길만 달리는, 연약한 SUV를 꼬집은 말이다. 그레나디어는 이 허점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불편함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 차는 분명 매력적이다.



김현동([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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