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슈바르첸베르크광장(Schwarzenberg platz)에서 다뉴브강을 끼고 레오폴트슈타트 방면으로 걷다 보면 비현실적인 건물이 등장한다. 벽체는 녹기 시작한 아이스크림처럼 흘러내리는 모습이고, 창틀은 연필로 대충 스케치한 것처럼 삐딱하다. 벽면에선 나무가 자라고 기둥은 오색으로 칠했다. 평평한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보도블록조차 올록볼록하다.
일러스트가 그림책 밖으로 튀어나온 듯한 건물은 오스트리아의 화가·건축가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의 작품 ‘훈데르트바서 하우스(Hundertwasser Haus)’와 ‘쿤스트 하우스(Kunst Haus)’다. 훈데르트바서 하우스는 50가구 이상의 비엔나 주민이 거주 중인 공공임대주택이며, 쿤스트 하우스는 훈데르트바서의 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박물관이다.
“세입자도 벽을 색칠할 권리 있다”
네모난 아파트에 살면서 네모난 지하철을 타고, 네모난 사무실에서 일하는 서울시민에겐 이곳이 벽돌조차 숨을 쉬는 ‘이상한 나라’처럼 다가온다. 서울의 건물은 대체로 네모반듯하다. 성냥갑 형태 아파트가 서울 전역을 차지하고 있어 ‘아파트 공화국’으로 불린다.
물론 이런 획일성을 반드시 비판적으로만 볼 건 아니다. 공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일 수 있어서다. 오스트리아처럼 역사가 긴 유럽 주요 도시와 달리, 서울은 단시일에 인구가 급증하고 대도시로 발전했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몰려드는 사람들을 모두 수용하려면 직선형 블록과 도로 중심의 건물, 반복적인 배치는 필연적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제 서울도 양적 팽창시대를 지나 삶의 질과 도시 정체성을 고민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반복적·획일적 도시 구조는 단기적인 주거 수요는 충족시킬 수 있지만, 삶의 다양성·창의성을 담기엔 한계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서울시민에게 훈데르트바서의 건축은 예술적인 조형물을 뛰어넘어, 사람 중심의 도시 공간을 구축한 모범 사례가 될 수 있다.
실제로 훈데르트바서 하우스는 임대주택에 실제로 거주할 시민 의견을 설계에 반영해 주민 개성을 담았다. 세입자가 자신의 창문 외관을 자유롭게 꾸밀 수도 있다. 훈데르트바서는 “거주자는 창문에서 팔을 뻗어 닿는 곳까지 벽면을 색칠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세입자는 못 하나 박는데 눈치 보는 서울과 대조적이다.
서울시 행정 측면에서도 배울 점이 있다. 대표적인 게 건폐율·용적률 규제다. 새로운 디자인을 추구하는 건물이 늘어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서울시가 허용하는 건폐율·용적률·층수에 최대한 맞춰서 최대한 높고 효율적인 건물을 올리려는 분위기는 여전하다.
여기에 공동주택 표준 설계와 같은 행정 기준까지 겹치면 쿤스트 하우스나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같은 창의적 설계는 요원하다. 실제로 하이엔드를 표방하며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랜드마크 건물을 지으려던 한 시행사가 자금난으로 인해 개성 없는 네모반듯한 건물을 올리는 사례도 있었다.
“위화감 준다”며 창의 설계 막는 서울시
서울시 유관부서나 도시건축위원회가 이처럼 관행적으로 창의적 설계를 막는지 검토하는 도시창의성위원회(가칭)를 구성하는 것도 해법이 될 수 있다. 경제성·교통영향·환경기준만 따져 개발 사업을 심의하는 관행에서 벗어나, 예술·사회·시민·언론 관계자가 미학적 관점에서 도시 정체성·창의성을 논의하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비엔나에서 만난 건축물은 ‘아파트 공화국’ 서울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보여준다. 건물이 도시를 구성하는 단계를 벗어나, 시민의 삶이 도시를 설계할 수 있다는 철학이다. 고밀도 도시에서 비표준 설계를 실현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효율성·수익성만 계속 추구한다면 서울의 스카이라인은 똑같은 네모난 창문에 갇힐 수밖에 없다.
훈데르트바서는 “현대 건물은 감옥이다. 이름도, 감정도 없고 공격적이고 무정하며, 차갑고 공허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비엔나는 임대아파트에 세입자의 개성을 담아내고, 획일적 규제에서 벗어나 인간의 다양성·창의성을 반영한 주거공간을 만들기 위해 장기간 노력했다. 반복과 효율이 빚어낸 ‘거대 도시’ 서울도 비엔나가 던진 메시지를 곱씹을 시점이 무르익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