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서울 시내 한 통신사 판매점 출입문에는 ‘번호이동 최대 200만원 지원’이란 문구가 붙어 있었다. 같은 날 경기도의 한 매장엔 “인터넷+TV+핸드폰 동시 가입 시 현금 최대 100만원에 TV, 무선청소기, 에어컨 택 증정”이란 현수막이 걸렸다.
일부 KT 대리점에서는 SK텔레콤(SKT) 이용자들에게 ‘나중엔 내 인생이 털린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말로 번호이동을 권유하라는 내용이 담긴 ‘고객 대응 대본’이 배포되기도 했다.
SKT의 번호이동 위약금 면제 시한(14일)과 이동통신단말장치 유통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단통법) 폐지를 앞두고 통신사들의 가입자 쟁탈 전쟁이 가열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SKT 위약금 면제가 시작된 지난 5일부터 12일까지 누적 12만4414명이 SKT를 떠났다. 토요일인 지난 12일에는 하루 만에 2만7931명이 이탈했다. SKT 해킹 사태 이전까지 일일 번호이동자 수가 1만 명가량에 그쳤던 것과 비교하면 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한 통신 대리점 관계자는 “100만원이니, 200만원이니 하는 보조금 액수가 어떻게 나올 수 있는 건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이해가 안 된다. 해킹 사태로 경쟁 판이 깔리니 예전처럼 무책임한 마케팅이 판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과열 경쟁 양상을 보이자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 7일 SKT·KT·LG유플러스 등 통신 3사 마케팅 담당 임원들을 불러 지나친 경쟁을 자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달궈진 현장 분위기는 가라앉지 않고 있다. 업계에선 이 열기가 당분간 이어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14일 이후 위약금 면제가 종료되더라도 오는 22일부터 단통법이 폐지돼 보조금 상한선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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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T 해킹에 단통법 폐지 맞물려 “전례 없는 과열”
15일부터는 삼성전자의 신제품 갤럭시 Z 폴드7, Z 플립 7의 사전 판매도 시작된다. 단통법이 시행 중이던 시기에도 갤럭시나 아이폰 신제품이 출시되면 현장서 ‘번호이동 전쟁’은 한층 치열해지는 양상을 보였다.
통신 업계 관계자는 “1위 사업자가 위기에 빠지고 때마침 단통법도 사라지니, 추격자들에게 큰 기회가 생긴 건 분명하다”며 “앞으로도 전례 없는 경쟁이 펼쳐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신용평가사인 한국기업평가도 10일 통신 시장 전망 리포트를 통해 “제1의 시장 지위를 바탕으로 업권 내 가장 큰 영향력과 자금력을 보유한 선두사업자가 경쟁사들과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갖게 돼, 상호 협조적 균형을 기대하기는 상당히 어려워졌다”고 분석했다.
통신사 간 경쟁 과열은 휴대전화 구입을 앞둔 소비자 입장에서 반길만한 일일 수 있지만, 과거 존재했던 부작용들이 재현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허위·과장 광고가 늘거나, 보조금을 미끼로 비싼 요금제를 강제해 실제로는 소비자들에게 별로 이익이 되지 않는 편법 판매가 이뤄질 수 있어서다. 또 정보 격차가 발생해 일부 소비자의 상대적 손해가 커지고, 마케팅비가 과도하게 투입돼 가격 인상과 서비스 품질 저하로 번질 수 있다.
경기 지역의 한 대리점주는 “통신사들이 그냥 손해 보는 일을 할 리는 없다. 보조금이나 사은품을 늘리는 방식의 마케팅 경쟁이 과열되면 통신사들은 다른 방법으로 이익을 얻으려 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라며 “너무 과한 경쟁은 장기적으로 소비자에게도, 대리점 등 소상공인들에게도 위험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