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님이냐 나라님이냐, 그것이 문제다.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를 담은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며 공기업과 금융지주의 이사회가 샌드위치 신세가 될 판이다. 주주 이익 최대화와 공익 및 국가 정책이 충돌할 때의 계산이 더욱 복잡해지게 됐다. 나라님이 무서워 주주님의 이익에 반하거나 훼손하는 선택을 하면 배임에 딱 걸릴 수 있다. 반대로 주주님만 생각하다 나라님의 심기와 여론을 거스르면 어떤 후폭풍을 맞을지 알 수 없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한국의 자본시장에서 상장 공기업과 금융지주사는 시장과 자본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지 못했다. 사회의 기간 인프라를 운영하며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기업은 상장사임에도 정부 정책에 손발이 묶여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정부 등 공공 지분이 절반을 넘는 대주주인 탓에 일반 소액주주의 권리는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대표적인 곳이 한국전력이다. 탈원전과 에너지 가격 급등으로 발전단가가 높아져도 전기요금을 제대로 올리지 못했다. 전기요금 인상에 대한 저항과 물가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우려 탓이다. 원가보다 싸게 물건을 팔아야 했다. 밑지는 장사를 하면서도 원가 급등에 발맞춘 가격 인상은 엄두도 못 냈다. 적자는 쌓여갔고, 채권(한전채)을 발행해 버텨왔다. 눈덩이처럼 늘어난 빚은 당연한 수순이다.
2021년 2분기부터 쌓인 한전의 적자는 올해 1분기 말 기준 31조4905억원이다. 올해 1분기 말 기준 한전의 누적부채는 206조8019억원에 이른다. 연간 이자만 4조원 수준이다. 적자 행진에 빚더미에 올라앉은 기업의 주가는 바닥을 기었고 배당 여력도 줄어 주주의 상심은 컸다. 정부가 전기요금을 틀어쥐며 부실이 커지자, 소액주주들은 차라리 정부가 지분을 사들여 상장폐지하라고 할 정도였다.
은행을 가진 금융지주사도 상장사임에도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라이선스(인가) 산업인 은행은 과점 체제의 수혜를 누리는 데다 대표적인 규제 산업이다. 정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금융의 공공성에 대한 강조에 더해 ‘이자 장사’라는 비판까지 가세하며 은행은 각종 자금 출연의 단골 손님이 됐다. 정부 재정으로 감당해야 할 부분에 상생과 공적 책임을 덧씌워 은행의 돈을 투입했다.
정부 입김에 시달린 공기업·은행 상법 개정에 주주 충실 의무 생겨 주주 반격 세지며 갈등 커질 수도
그뿐만 아니다. 배당까지 정부가 간섭했다. 코로나 팬데믹 당시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을 위한 대출 만기 연장과 원리금 상환 유예 등이 이어지며 금융당국이 은행에 대손준비금을 더 쌓으라며 배당 성향을 낮출 것을 권고했다. 사상 최대의 실적에 높은 배당을 기대했던 주주들은 된통 당했다. 외국인 투자자를 비롯한 주주들은 황당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질 수 있게 됐다. 주주권을 강화한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며 주주도 반격에 나설 수 있어서다. 전기요금을 찔끔 올리거나 동결해 적자가 늘어나 회사의 부실이 커지면 한전 이사회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이사진을 겨냥한 소송도 배제할 수 없다. 주주에게 배당으로 돌아갈 수 있는 돈을 상생기금으로 출연하면 금융 지주사 주주도 이젠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관성이다. 개정 상법으로 상장사가 주주를 의식해야 하는 만큼 정부가 지금까지처럼 공기업의 목을 죄고 금융지주의 팔을 비틀어 원하는 바를 얻어내기가 쉽지 않겠지만, 정부가 곧바로 태세 전환을 할지는 의문이다. 공기업 대주주인 정부가 소액주주의 이익을 보호하겠다고 전기요금이나 가스요금 인상과 같은 정치적 무리수를 허용하지는 않을 것이란 시각이 지배적인 만큼 갈등은 커질 수 있다.
정부가 추진하는 개인 채무 탕감만 봐도 달라진 것은 없는 듯하다. 정부는 7년 이상 연체된 5000만원 이하의 무담보 빚을 가진 개인 채무 16조4000억원의 탕감에 나서며 소요 재원의 절반인 4000억원을 은행권이 출연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상법상 배임 우려는 안중에도 없다. 그나마 소각 채권 상당 부분을 제2금융권이 보유한 만큼 2·3 금융권의 부실 채권까지 은행 출연금으로 소각하는 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에 재원 출연을 전 금융권으로 확대했을 뿐이다.
경영계의 반대에도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를 위해 주주권 강화를 위한 상법 개정에 박차를 가한 만큼 그 안착을 위해서는 정부도 달라져야 한다. 공익이나 사회적 책임을 앞세워 나랏돈을 써야 할 일을 공기업과 은행 등에 떠넘기며 이들 상장사 주주의 희생을 강요하고 묵인하는 것은 옳지 않다. 최소한 상장사라면 시장의 논리에 따라 움직일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게 상법 개정의 취지를 살리는 길이자 정부가 할 수 있는 솔선수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