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경남 사천시 경남테크노파크(TP) 우주항공특화본부. 항공기 부품 제조사 ‘씨엔리’ 직원들이 헬리콥터 문을 만들고 있었다. 항공 부품 제작에 필수인 높이 5m 이상의 ‘오토 클레이브’ 등 고가의 대형 장비를 이곳에서 빌려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최태원(63) 씨엔리 대표는 “산단에 TP가 있어서 사업 확장이 쉬웠고, 인근 종포산단에는 관련 기업이 집적해 있어서 협력하기도 좋다”고 말했다.
기업들이 몰리는 산단은 유치 자체가 아니라 ‘유치 그 이후’가 산단의 성패를 가른다는 점을 보여준다. 항공산업을 잡은 사천시와 최근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를 유치한 울산시가 대표적이다. 산단의 축 역할을 하는 ‘앵커 기업’과 입주 기업과 인재를 위한 지자체의 기획력이 산단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
지자체가 나서 미래 산업 먹거리 발굴
경남 사천엔 사천공항을 중심으로 앵커 기업인 한국항공우주산업(KAI)과 분양률 100%를 자랑하는 종포산단 등 항공기 부품 제조사들이 밀집해 있다. 1999년 KAI 출범 이후 협력 업체가 점차 늘자 사천시는 2014년 종포산단을 지정했다. 동시에 경남도는 종포산단 인근에 ‘우주항공국가산단’을 유치해 항공산업과 밀접한 ‘우주’ 분야로 지역 산업을 확장했다. 경남도는 산하의 경남TP 우주항공특화본부를 사천에 두고 중소기업의 연구개발을 도왔다.
기업 맞춤형 산단도 새로 꾸렸다. 사천시와 경남도가 만든 ‘용당항공MRO(유지·보수·정비)산단’은 KAI·한국항공서비스(KAEMS)가 입주했다. 박용국 사천시 투자유치산단과장은 “기업은 저렴하게 부지를 쓰고, 지자체는 재정 손실 위험을 줄이며 항공MRO 산업을 새로운 지역 먹거리로 키울 수 있다”고 말했다.
━
울산시, 주요 기업에 '전담 공무원' 상주 밀착 지원
‘원조’ 국가산단인 울산 미포국가산단은 현대자동차, HD현대중공업, SK에너지 등 주요 앵커 기업이 포진해 있다. 울산엔 또 국가산단 2곳과 일반산단 26곳(개발 예정지 포함)이 포진해 있어 울산 전체 면적의 약 1000㎢ 중 9.2%(92㎢)가 산단이다. 산단 분양률은 91~100%에 육박한다.
특히 최근 울산시는 전통 제조업이 많은 산단에 첨단산업을 끌어오기 위해 나섰다. 시는 3년째 SK, 현대차, HD현대중공업 등 기업별 ‘전담 공무원’을 지정해 인허가 컨설팅 등을 챙기고 있는데, 전담 공무원이 기업에 출근해 밀착 지원하는 식이다. SK그룹이 울산 미포산단에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를 짓기로 결정하며 성과를 거뒀다. 송연주 울산시 기업현장지원과장은 “SK 측에 데이터센터가 미포산단에 입주하면 민원 없이, 인허가도 빠르게 처리된단 점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
‘RE100 산단’ 빈 깡통 안되려면
이재명 정부가 추진하는 ‘RE100 산단 조성’도 앵커 기업과 지역의 산업적 기반을 고려해야 한다. 서남권·울산 등이 후보지로 거론되는 RE100 산단은 전력 사용량이 많은 첨단기술·모빌리티 기업을 앵커로 유치하는 게 과제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이 대통령이 RE100 산단에 대해 규제 제로 정책, 교육·정주 여건 지원, 입주사 전기요금 할인 등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고 말했다.
특히 수도권에 몰린 인재를 유치할 수 있는 전략이 중요하다. 해외에선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청년친화형 혁신지구 ‘코르텍스’가 성공 사례로 꼽힌다. 생명과학 산업을 활용해 앵커 기업의 자금력으로 도시 인프라 재구성에 힘썼고, 25~34세 인구가 유입돼 전체 인구의 20% 이상을 차지한다. 이원빈 산업연구원 지역산업정책실 연구위원은 “서남권의 풍부한 재생에너지 기반 장점이 기업이 원하는 입지와 겹칠지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며 “파격적인 유치 조건과 정부 및 지자체의 사후 관리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