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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중앙] 합판·테이프·나사…일상 재료로 빚어내는 미학적인 우주

중앙일보

2025.07.13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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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10월 소련(현 러시아)이 세계 최초 우주 탐사선인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해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냉전 시대, 다양한 분야에서 경쟁하던 미국과 소련은 우주 탐사 분야에서도 치열한 경쟁을 벌였죠. 미국은 아폴로 11호를 보내 인류 최초로 달에 직접 발걸음을 내디디며 우위를 점했어요.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 선장 닐 암스트롱은 달에 착륙해 "이것은 한 인간의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라는 소감을 남겼습니다. 이처럼 우주에 대한 인류의 열망은 과학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기술 발전을 이끌며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죠. 현재 가장 혁신적인 아티스트로 주목받는 톰 삭스(Tom Sachs)는 어려서부터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우주 탐사 프로젝트에 매료돼 우주와 관련한 작품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습니다. 우주 탐사 장비나 공간을 재현하는 것은 물론 우주라는 미지의 세계를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탐구하죠.
‘아폴로’의 달 착륙선 모형을 실물 크기로 만든 대형 설치 작품 '루나 익스커션 모듈(Landing Excursion Module·LEM)'은 톰 삭스 작품의 진수로 꼽힌다.
톰 삭스는 “과학과 종교는 우리가 어디서부터 왔는가를 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주는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고, 과학은 그걸 연구한다. 나는 내가 과학자라고 생각한다”면서 “우주 탐사를 통해 인간의 존재와 예술적 상상력의 경계를 넓힌다고 믿는다”라고 말했죠. 톰 삭스는 골판지·덕트 테이프·합판 등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해 작품을 만드는 '브리콜라주(Bricolage)' 기법으로 주로 작업하는데요. 브리콜라주는 손으로 하는 간단한 작업, 자질구레한 만들기를 뜻하는 프랑스어로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활용하고, 기존 사물들을 서로 결합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방식을 의미해요. 기술이 점점 더 완전무결한 방향으로 발전해 가는 이 시대에, 톰 삭스의 작업은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끝에서 빚어지는 브리콜라주의 정수를 보여준다고 평가받아요.

톰 삭스는 "나는 피카소 작품과 화장실 청소 도구 사이에 어떠한 가치 차이도 없다고 생각한다. 예술이든 일상용품이든 우주선이든 관계없이 가장 깊이 있고 진정한 관계를 맺으며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을 이해하고자 모든 것에 대해 탐구한다"고 자신의 작업 과정을 설명했죠. 이런 그의 철학이 담긴 거대한 우주선이 지난 4월 서울에 착륙했습니다. 톰 삭스의 최신작이자 대표작인 ‘스페이스 프로그램: 무한대(Infinity)’의 작품 전체를 볼 수 있는 전시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29 톰 삭스 전’이 서울 동대문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1관에서 오는 9월 7일까지 열려요. 이번 전시는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우주에는 인간만이 존재하는가'와 같은 근원적 질문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 톰 삭스의 탐구 과정과 그 흔적들을 살펴볼 수 있죠. 관객들은 톰 삭스가 구현한 우주를 직접 탐사하고 저마다 자신만의 미션을 수행하며, 장벽이 없는 무한한 우주를 마주할 수 있습니다.
현재 가장 혁신적인 아티스트로 주목받는 톰 삭스(가운데)는 어려서부터 미국 항공우주국(NASA) 탐사 프로젝트에 매료돼 우주 관련 작품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톰 삭스의 '스페이스 프로그램'은 2007년 처음 선보인 ‘아폴로 달 착륙선’을 브리콜라주 기법으로 구현하며 시작됐어요. 세계 최초로 달에 착륙한 아폴로 11호에 매료된 그는 현재까지 우주 탐사에 필요한 최첨단 장비와 우주선 등을 핸드메이드로 제작하며 독보적인 스타일을 구축한 작가로 알려졌는데요. 2007년 로스앤젤레스의 가고시안 갤러리에서 달로 향하는 첫 번째 항해를 시작한 톰 삭스는 2012년 뉴욕의 파크 애비뉴 아모리에서 화성에 착륙해 미생물 표본을 채취하는 모습을 작품으로 구현해 호평을 자아냈죠. 2016년에는 샌프란시스코의 예르바 부에나 예술센터에서 목성의 위성 유로파를 탐사하는 여정을 이어나가며 견고한 작품 세계를 만들었고 2021년에는 함부르크의 다이히토어할렌 현대미술관에서 전기차·반도체 등 첨단 산업의 핵심 소재이기도 한 희토류 채굴 미션을 수행하는 전시를 선보여 화제를 모았죠.

확고한 자기 스타일을 구축한 톰 삭스는 이번 전시에서 NASA의 우주 탐사 계획을 재구성한 대형 설치·조각품과 더불어 여러 신작을 세계 최초로 공개했는데요. 화성에 착륙해 암석 등 샘플을 채취하는 모습은 물론 목성의 얼음 위성인 유로파에서 다도회를 여는 모습, 예상치 못한 외계 생명체와 조우하는 장면 등 미지의 세계를 향한 여정의 순간들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이 이번 전시의 특징으로 꼽혀요. 전시 관계자는 "관람객들은 광활한 우주를 탐사하며 초월의 세계로 나가는 듯한 생생한 몰입의 경험을 할 수 있다"며 "국내에서 열린 톰 삭스의 개인전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라고 강조했습니다.

전시는 골판지와 합판으로 사람이 탈 수 있는 실물 크기 우주 착륙선을 만들고, 우주과학자의 용어를 사용하는 등 마치 우주 연구실에 온 것 같습니다. 전시실에 들어서면 실험실에 들어갈 때 필수적으로 거치는 에어샤워 시설을 모티브로 한 ‘로버트 어윈 스크림 클린 에어 룸(RISCAR)’이 설치됐는데요. 마치 톰 삭스가 ‘이제 당신은 일상에서 우주로의 경계선을 넘은 것’이라고 본격적인 전시를 안내하는 듯했어요.
톰 삭스는 골판지·덕트 테이프·합판 등 흔히 볼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는 ‘브리콜라주(Bricolage)’ 기법을 주로 활용한다.
이 게이트를 넘으면 우주 탐사에 필요한 다양한 도구가 전시된 첫 번째 섹션 'astrobiology(우주생물학)'가 펼쳐져요. 조금 전까지 누군가가 관찰한 것처럼 보이는 현미경은 물론 형형색색의 운석 샘플 모형 그리고 브리콜라주 기법을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구현한 우주 헬멧(Gold Helmet) 등이 전시돼 있죠. 이와 함께 '특수 효과: 점화, 발사' 과정을 볼 수 있도록 제작한 영상이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어요.

'스페이스 프로그램'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으로 특수 효과를 이용해 우주선의 엔진 점화, 발사 그리고 우주에서의 여정까지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구성했죠. 모든 과정은 컴퓨터 그래픽이 아닌 우주선 모형과 카메라 트릭의 조합을 통해 제작했다고 해요. 자세히 살펴보면 우주선의 엔진은 토치에서 나오는 불꽃으로, 우주선 발사는 스모크 머신을 분출하는 카메라를 통해 표현하는 등 톰 삭스만의 센스를 엿볼 수 있었죠. 우주선 점화 과정은 전시장 홀에 위치한 임무 관제 센터(Mission Control Center·MCC)의 지시하에 진행되며 48개의 모니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조성했습니다.

이어 'SAMPLE COLLECTION(샘플 컬렉션)' 섹션에는 '탐사용 운반 카트'가 전시돼 있었죠. '스페이스 프로그램'의 주요 목적 중 하나가 행성에서 샘플을 채취하고 분석해 활용 가능한 자원인지 탐구하는 것인데, 그때 탐사용 운반 카트를 이용해 지표면에서 샘플을 얻고 운반한다고 해요, 실제 달 탐사에서 사용한 운반 카트를 톰 삭스가 새롭게 재구성한 작품으로 카메라와 샘플 채취 장비 등을 갖추고 있었죠.
NASA 우주비행 관제센터를 모티브로 제작된 퍼포먼스 설치 작품 ‘임무 관제 센터(MCC)’에서는 실제 우주 탐사를 방불케 하는 영상이 방송된다.
지난 임무에서 획득한 유물과 스페이스 프로그램을 주제로 한 예술 작품을 모아놓은 'MUSEUM OF THE MOON(뮤지엄 오브 더 문)' 섹션에선 SLR 카메라 렌즈를 활용해 만든 미니 우주선, 두루마리 휴지를 이어 만든 로켓 등 브리콜라주 기법의 정수를 엿볼 수 있어요. 특히 다도에 깊은 관심을 보인 톰 삭스는 일본 전통 다실을 모티브로 삼아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한 '다실 모형' 작품을 선보였는데, 이 공간에는 그가 직접 만든 NASA 찻잔을 비롯한 다양한 다도용 도구들이 자세히 들여 봐야 할 정도로 아담한 크기로 정갈하게 배치돼 있었죠. 다실에 전통적으로 스승의 초상화를 거는 자리에는 무하마드 알리의 초상을 걸어놔 관객들에게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이 다실은 톰 삭스의 '스페이스 프로그램'에도 등장하는데, 우주 미션 수행 중 불안과 감정 변화를 겪는 우주인들이 다도 의식을 통해 마음을 가라앉히고 심신의 안정을 되찾게 하는 목적을 갖고 있다고 해요.

아폴로 프로젝트에 투입된 달 탐사선(Lunar Lander)의 조종석을 톰 삭스가 브리콜라주 기법을 이용해 구현한 작품 '의사(DOCTOR)'도 만날 수 있어요. 이 작품은 합판의 거칠고 투박한 표면, 눈에 띄게 노출된 나사와 같이 수작업의 흔적을 과감하게 드러낸 것이 특징이며 거친 수작업의 흔적과 대조적으로 매우 정교하게 조종석의 모습을 표현했죠. 빼곡하게 늘어선 스위치와 계기판은 실제 조종석을 거의 그대로 재현해 감탄을 자아냅니다. 이처럼 거친 표현 방식과 정돈된 배치는 서로 긴장감을 이루며 독특한 미학을 선사한다고 평가받죠.
‘MUSEUM OF THE MOON(뮤지엄 오브 더 문)’ 섹션에선 SLR 카메라 렌즈를 활용해 만든 미니 우주선, 두루마리 휴지를 이어 만든 로켓 등 브리콜라주 기법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다음으로는 우주 비행 전후의 작업을 수행하는 과정을 담은 'QUARANTINE(격리)' 섹션이 이어져요. 우주복을 비롯해 우주에서 채취한 표본들이 목록별로 분류된 다양한 작품들을 만난 뒤엔 톰 삭스 작품의 진수 '루나 익스커션 모듈(Landing Excursion Module·LEM)'이 시선을 빼앗죠. NASA 달 탐사 임무 ‘아폴로’의 달 착륙선 모형을 실물 크기로 만든 톰 삭스의 대형 설치 작품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합판과 테이프 등 아날로그 방식을 이용한 게 티가 나요. 이에 대해 톰 삭스는 “예술가의 특권은 흔적을 남기는 것이고 삼성과 애플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며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듯 날것으로 남기는 것”이라고 강조했죠.

거대한 우주선을 지나면 NASA 우주비행 관제센터를 모티브로 제작된 퍼포먼스 설치 작품 '임무 관제 센터(MCC)'가 있습니다. 여러 개의 모니터에서 로켓 발사부터 우주선이 궤도에 올라 임무를 수행하는 모습 그리고 다시 지구로 복귀할 때까지의 가상 여정이 송출되는데, 이는 통신과 제어를 상징하죠. “나는 다른 누군가가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무언가를 만들고 싶지는 않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후부터 나는 나다운 방식으로 만드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내가 만드는 모든 것은 누가 봐도 '톰 삭스의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다.” 그의 말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톰 삭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서사로 가득 메운 전시였습니다.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29 톰 삭스 전’
기간: 9월 7일까지
장소: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1관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8시(입장 마감 오후 7시)
입장료: 어린이 1만3000원, 청소년 1만5000원, 성인 2만원



이보라([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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