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한국과 관세 협상에서 소고기·쌀 등 농산물 시장 개방을 강하게 요구하는 가운데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전략적 판단을 해야 한다”며 일부 수용 가능성을 내비쳤다.
여한구 본부장은 14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브리핑에서 “사실 농산물 (시장 개방)은 미국뿐만이 아니라 어느 나라와 협상을 하건 고통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고, 그러면서 한국의 산업 경쟁력은 강화됐다”며 “농산물 분야에서도 이제 전략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제도 개선이나 경쟁력 강화, 소비자 후생 측면에서 유연하게 볼 부분이 분명히 있다”며 “민감한 부분은 지키되 그렇지 않은 것은 협상의 전체 큰 틀에서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여 본부장의 이번 발언은 자동차·반도체 등 주력 산업의 관세 인하 등을 위해 전략적인 차원에서 미국의 농산물 시장 개방 요구를 일부 수용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여 본부장은 지난 4일 국회에서는 미국의 쌀·소고기 등 시장 개방 압력에 대해 “우리가 방어를 해야 하는 부분은 강하게 방어하려고 한다”고 말했지만, 지난 5~10일(현지시간) 미국과 협상 이후 뉘앙스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미국은 현재 관세 협상을 벌이는 국가들에 농산물 시장 개방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일본에는 쌀 개방 압력이 심하다. 협상 타결이 근접했던 것으로 알려졌던 EU(유럽연합)·인도 등도 농산물 문제로 막판 난항을 겪고 있다. 특히 인도는 미국의 유전자변형 농산물 개방 요구에 난색을 보이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이날 “자동차와 농산물 관세가 협상의 막판 쟁점으로 부상했다”고 보도했다. 한 통상 전문가는 “무역적자 해소를 원하는 미국은 상대국보다 우위에 있는 농산물의 수출을 확대하려고 한다”며 “이런 압박이 대체로 협상의 장애물로 작용하는 가운데 베트남은 농산물 시장을 미국에 무관세로 개방하면서 조기 타결을 이룰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한국에도 압박 강도를 높이고 있다. 통상당국은 미국과 구체적인 논의 내용을 함구하고 있지만 ▶30개월령 이상 소고기 수입 허용 ▶쌀 시장 개방 확대 ▶감자 등 유전자변형작물(LMO) 수입 허용 ▶사과·블루베리·체리 등 과일에 대한 검역 완화 등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통상당국 관계자는 “지난 3월 무역장벽보고서(NTE)에서 제기한 문제가 대부분 포함됐다”고 설명했다.
주무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에서는 LMO 감자 수입 정도가 논의 가능할 것이라는 내부 평가가 나왔다. LMO 감자 수입 절차는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인체 안전성 검사만 남았고, 현재 수입 절차를 진행 중이다. 30개월령 이상 소고기 수입은 오히려 미국의 실익이 크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다. 이명박 정부 시절 광우병 사태로 번진 전례로 볼 때 미국산 소고기 전체에 대한 한국 소비자의 거부감을 높일 수 있어 미국 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상황이다. 실제 한국은 지난해 미국산 소고기 최대 수입국이었다.
통상당국은 미국 측과 이번 방미 기간 사과와 관련한 논의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1993년에 한국에 사과 수입위험분석을 신청했는데, 현재 8단계 절차 가운데 2단계(수입위험분석 착수)를 거쳐 3단계(예비위험평가)에서 멈춰 있다. 미국 측은 이런 검역 절차에 대한 불만이 크다. 하지만 농식품부는 “사과 검역 과정에서 과실파리·과수화상병 등 병해충 확산 우려가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에 절차를 더는 진행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쌀 수입 문제 역시 정부가 양보하기 어렵다. 한국은 2015년 쌀 시장을 개방하는 대신 513%의 고율 관세를 매기면서 세계무역기구(WTO) 규제에 따라 일정 물량(저율관세할당물량·TRQ)은 5%의 저율 관세로 수입하기로 했다. TRQ 물량(매년 40만8700t) 중 32.4%를 미국에서 수입 중인데, 이를 조정하려면 다른 국가와 협의도 이뤄져야 한다.
농민단체들은 이날 여 본부장의 발언에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이날 전국농민회총연맹은 “미국의 비상식적이고 몰지각한 통상압박에 굴복해 또다시 농업을 희생시키겠다는 것”이라며 “국민의 제2의 한미FTA 투쟁과 제2의 광우병 촛불로 화답할 것”이라는 입장문을 냈다.
서진교 GS&J인스티튜트 원장은 “통상당국이 돌려 말하며 여론의 동향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며 “만약 미국이 실제 농산물 시장 개방이나 검역 절차 개선 등을 요구하고 있다면, 먼저 농민들에게 사실을 제대로 알려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라고 주문했다.
박성훈 고려대 국제대학원 명예교수는 “대외 협상만큼이나 대내 협상이 중요하다”며 “농산물을 양보하는 대신 관세를 크게 내릴 수 있다면, 통상지원법 등을 활용해 농민들의 피해를 보상하거나 관세 완화의 혜택을 받은 산업의 이익을 농민들과 공유하는 형태의 방안 등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여 본부장은 8월 1일 후 한국이 상호관세를 부과받을 가능성을 묻는 말에 “최악의 시나리오도 함께 대비해야 하는 상황”이라면서도 “시간 때문에 실리를 희생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